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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국가유공자를 사랑하는 모임 &amp;gt; 보훈정보 &amp;gt; 노병의 독백</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link>
<description>국가유공자 단체,국사모,현역군인 부상 질병 민원,상이군경 참전유공자 고엽제 재해부상군경 등록 안내,상이등급 신체검사,법률상담,행정,소송,보훈혜택,보상금</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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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세계로 부는 한류열풍과 휘날리는 태극기</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40</link>
	<description><![CDATA[내가 무작정 상경한 것이 열여섯 되는 해(1946.2)이니, 오늘로서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자신은 대단한 인물은 못된다고 생각하지만, 어렸을 때 청운(?)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났으니, 의식하던 안하던 지나온 발자취를 뒤돌아보게 된다.
  일본 식민지 시대엔 가난한 가운데 일본 정부의 우민정치(愚民政治)로 내 연배는 배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대부분이 문맹이다.
 내가 기억하는 교육기관도 강원도 춘천이 도청 소재지인데도, 한국인이 다니는 초등학교(春川本町公立國民學校)와 일본인이 다니는 초등학교(春川綠丘公立國民學校)의 둘뿐이었는데, 일본인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잘 모르지만 한국인이 다니는 초등하교는 전체 학생수가 2천 6백여 명이며, 1개 학급의 정원은 90명 내외다.
 졸업을 앞두고(1944.3.1) 학급의 반장을 하던 나는 관비 학생으로 등록금이 필요 없는 사범학교 진학을 희망했으나, 아버지가 없는 결손가정이라 학교 훈도(선생)가 되기엔 부적격하다는 이유로 학교 당국의 입학 추천을 받지 못해 진학을 포기하고, 중학교와 농업학교는 돈이 없어 응시의 길이 막히자 생각다 못한 나는 장래가 보장된다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군수공장인 인천 히타치공장으로 떠난다.

  공장에서 열심히 기술을 배우고 있는데, 해방이 되며 다시 인생의 앞길을 설계해야 할 기회가 돌아오자 나는 무작정 상경해서 어렵게 중학교를 마치고, 초등학교 준교사 자격시험을 거쳐 꿈에 그리던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나(1950. 6.19) 등교 1주일 만에 6•25사변이 발발하여 고향으로 피난 가서 정치체제의 변화를 바라보고 있는데, 반동분자라고 제거하러 온 인민군 정찰병을 어렵게 따돌린다.
  서울이 수복된(1950.9.28) 후엔 군에 소집되어 국민방위군으로, 사병 때는 김화 저격능선 전투에서 중공군과 대치하며, 진지를 점령하려 고지를 기어오르는 중공군을 막으려고 쏘는 아군의 진내사격을 엄폐된 교통호로 들어가 포탄을 피하고, 장교로 임관해선 정보장교로 월남에 파병되어 전쟁을 수행하는데 일조를 한다.
  국내로 돌아와선 합참에서 계속 월남전을 수행하다 야전으로 나가 국토를 지키는데, 김일성의 남침 야욕이 증가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서울 방어사단 창설에 참여하고, 육군의 추천으로 청와대로 들어가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를 익히고, 관광지와 회의장을 시찰하고 국내로 돌아와선, 외국에서 견학한 지식을 살려 국내 관광산업에 접목하여 한국 관광을 국제수준에 맞추려고 노력 한다.

  관광입국(觀光立國)을 목표한 지 30년이 지나니 우리나라가 세계 관광산업의 첨단을 달리지만, 옛날엔 관광지다운 관광지가 없고 국제경기장이나 국제회의장이 전무하던 나라가, 아사아경기대회와 올림픽경기를 무사히 치르고, 20여 년이 지나니 한국에서 소진(消盡)된 활력소를 재충전하며, 국제경기와 국제회의를 한국에서 개최하지 않으면 성공을 보장 못한다고 행사 관계자가 우려를 한다.                                        
  의도적으로 계획한 산행(山行)은 아니지만 일요일(2007.8.26)이라 등산을 결심하고, 서울 북한산 승가사를 찾았더니 등산객이 꼬리를 물고 산으로 올라오는데, 나는 중학교에 다닐 때(1947) 소풍 목적지가 승가사로 결정되어, 전차를 타고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  내려 담임선생에 이끌려 같은 반 학생들과 같이 열 지어 승가사를 목표삼아 북한산을 오르던 추억이 회상된다.
  12시가 되니 “대앵...,대앵...,대앵...,”하고 산사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리며 식당에선 등산객에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나도 등산객 틈에 끼어 식사를 맛있게 먹는데, 옆에 앉은 어린이는 밥을 먹지 못하고 젓가락으로 끼적거리며 자기 아버지에게, “아빠! 피자는 안 주나?”라고 묻는다.
  이조 시대에 조정에선 매일같이 정쟁(政爭)으로 소일하여 나라가 쇠약(衰弱)해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국민은 무식하여 세계 여러 나라의 동정과 멸시(蔑視)를 받던 민족이,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목표를 세우고 정치를 하니, 초근목피(草根木皮)다, 보릿고개다, 춘궁기(春窮期)다 하는 단어가 60년이 지나니 생활에서 사라지고, 외국과의 무역으로 국민소득이 2만 불이라고 하며, 지난 광복절(2007)엔 ㅇㅇ일보 사설(社說)에서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되고, 건국한 지 반세기 만에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운 아프리카 53개국의 GDP(국민총생산고)를 합해도 우리 경제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보도한다.

  운동경기에선 야구와 축구에서, 골프와 정구, 양궁과 사격에서, 수영과 빙상에서, 농구와 핸드볼에서 한국선수들의 입상 소식이 연일 보도된다.

  우리나라 역사를 요약하여 살펴보면 고조선 시대는 건국과 민족 기반조성을, 고구려 시대는 민족 통합과 대륙으로의 웅비를, 발해와 3국 시대엔 국가 기반을 공고히 하고 민족의 단결을 도모 하던 시대로, 이조 시대엔 당쟁과 신분사회. 사대사상에 몰입하여 지정학적 위치에서 외세를 불러들이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36년간은 압박과 설움에서 비애를 씹으며, 스스로 민족적 열등감에 울어야 하고, 해방 후 5년간은 국토의 분단과 이념의 대립, 사회 혼란을 겪어야 하고, 6•25사변 발발 후엔 동족상잔의 아픔을 씹어야 했다.
   
  휴전 후 10년간은 전후 복구를, 이후 30년은 생활안정과 사회질서 확립에 전념 했으며, 그 뒤로는 위정자와 사회지도층은 국리민복에 힘썼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경제대국(經濟大國)이오, 스포츠 강국이 되고, 사회에선 국민이 2만 불 고지를 넘어 3만 불 고지를 향해서 뛸 때,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경제를 살리고 국민통합을 이루겠다고 다짐하며 국민소득 4만 불 시대를 약속하고, 외국 언론에선 불도저 대통령 후보가 당선됐다는 제목으로, 이명박 후보의 선거운동 과정과 그 결과를 상세히 보도한다.

  옛날엔 선조들이 정쟁(政爭)으로 소일하며 국론을 분열시켜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이웃니라 일본이 한국을 병탄(倂呑)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남자들은 징병이란 이름으로 군인으로 끌려가 전쟁터에서 죽고, 징용이란 이름으로 노동자로 끌려가 탄광이나 공장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처녀들도 여자정신대란 이름으로 전쟁터로 끌려가 군인들의 성노예로 전락하며 일생을 망친다.

  국민들은 교육기관이 없어 배우지 못해 무식하며, 수입이 없는 조국은 가난한 나라가 되었으나,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뛰어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후손에게 물려주자고, 가지고 있는 기술과 특성, 소질에 따라 밤낮 구분 없이 열심히 뛴다.
 식민지에서 해방(1945.8.15)되고, 군정을 거쳐 3년 후인 8월 15일, 독립을 선포하고 60년이 지나니, 해방 이전엔 봄이 돌아오면 춘궁기라고 해서 밥을 굶는 집이 태반이었는데, 지금은 세계 13위의 경제 대국이 되어 4시4철 식량이 풍부하고, 국민이 2만 불 시대를 넘어 3만 불 시대를 향해서 달리고 있는데, 대통령 당선자는 4만 불 시대를 약속한다.
  남들은 한 가지 직업으로 만족하고 평생을 한 곳에 머무는데, 나는 한 가지 직업과 한 장소에 머무는 것에 만족치 못하고, 전쟁터를 포함해서 국내는 물론이오, 극동과 동남아, 미주와 구라파로 열심히 뛰다 보니 어느덧 인생의 황혼 길에 접어든다.

  한국은 36년에 걸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인적, 물적 착취를 당하다가 현대에 들어와서 대등한 나라가 됐지만, 모든 분야에서 일본을 제치겠다는 것이 민족적 비원이 됐다. 
  2월 23일 중국 중칭 올림픽스포츠센타에서 열린 2008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최종 예선대회에서 전반 14분에 염기훈 선수의 선제골로 한국이 앞서갔지만, 후반 22분에 일본의 야마세고지 선수에게 동점골을 내줘 1대1로 비겼다.
  한국과 일본은 무승부로 승점은 같지만, 그동안 거쳐 온 경기에서 한국이 득점5, 실점 4로 일본의 득점 3, 실점 3릐 득점에 앞서, 상금 500만 달러와 함께 우승을 차지했다.

  2008년 2월 25일은 제17대 대통령의 취임 날이다. 1948년 8월 20일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취임한 이래 꼭 60년만이다.
  서울 국회 의사당 광장에서 국내외 귀빈과 일반 국민 등 5만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올해를 선진화 원년으로 선포하고, 우리는 이념의 시대를 넘어 실용화 시대로 가야 한다”라고 선언하며 힘찬 첫 발을 내 디딘다.
“지난 10년, 더러는 멈칫거리고 좌절하기도 했지만, 실패의 아픔까지도 자산으로 삼아야 한다. 새로운 대한민국 60년이 시작되는 첫해인 2008년을 대한민국 선진화의 원년으로 선포한다”라고 포호(咆號)한다.    
  그는 “세계 역사상 최단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현실을 우리 의지와 힘으로 동시에 이뤄냈다”며, “남들은 이를 기적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우리가 다 함께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이라고 말한다.
  이어 이대통령은 5대 국정지표로서 국민 섬기기, 경제발전과 사회통합, 문화 창달과 과학기술 발전, 튼튼한 안보, 국제사회의 책임 다하기 등을 제시한다.

  나라 안팎에선 장밋빛 소식만 들려오는데, 나는 고엽제후유증으로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 몸으로 노년이 되니, 또 고엽제후유증이 초청하지 안했는데 피부병을 가지고 찾아와 대문에서 기다린다는 전갈에, 고통(苦痛)이 나가 손님을 맞을 뿐, 나는 가족에게조차 고엽제후유증의 방문을 알리지 못한다.]]></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Tue, 26 Feb 2008 19:48:1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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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컴퓨터 소고</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39</link>
	<description><![CDATA[아침에 집사람과 Computer를 얘기하며 "참 세상이 편리해서 살기가 좋아졌다'라고 말하자, 집사람이 말 하기를, "1950년대 까지는 접시에 머리 기름인 아주까리나 동백 기름을 부어 등잔을 만들어 어둠을 밝혔고, 1950년대 이후엔 미국에서 석유가 들어오며 맥주병에 석유를 담아 등잔 아닌 남포의 기름으로 사용하고, 전기불이 보편화 된 소도시로 나가면, 여관 방에선 칸막이 한 벽 상단에 4각형 구멍을 뚫고 전들불을 가설하여 옆방과 같이 어둠을 밝혔습니다" 라고 한다.
1987년 5월에 뇌출혈로 쓸어지며 식물인간으로 3.4년을 병원 침대에서 지나고, 퇴원해선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누워서 5,6년을 지내며 투병을 하다 앉게 되자 걸음마를 배우고,  온 몸으로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며(언어가 서투르고 필기가 불가능 함) 의사 표시를 한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으면 8살 된 손자는 컴퓨터를 한다고 할아버지가 입력한 자막을 지우고, 12살 난 손녀딸은 자기가 컴퓨터를 하겠다고 자리 양보를 강요한다.
2003년에 와서야 의식을 되찾고, 국가보훈처에 앓고 있는 질병을 신고하니, 전상 군인이라고 생활비를 보조한다.
옛날에 비하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됐지만, 그래도 사회에선 불평하는 사람이 많고 불만이 가득하다.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Wed, 16 Jan 2008 10:17:4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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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송구영신</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38</link>
	<description><![CDATA[ 내가 무작정 상경한 것이 1946년 2월로, 오늘이 2007년 12월 31일이니 만 60년과 10개월이 흘렀다. 나는 대단한 인물은 못되지만 어렸을 때 청운(?)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났으니, 의식하던 안하던 지나온 발자취를 뒤돌아보게 된다.  
  일본 식민지 시대엔 일본 정부의 우민정치(愚民政治)로 우리 연배는 배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대부분이 문맹이다.
  내가 기억하는 교육기관은 강원도 춘천이 도청 소재지인데도, 한국인이 다니는 초등학교(春川本町公立國民學校)와 일본인이 다니는 초등학교(春川綠丘公立國民學校)가 있었는데, 일본인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잘 모르지만 한국인이 다니는 초등하교는 전체 학생수가 2천 6백여 명이며, 1개 학급의 정원은 90명 내외다. 
  졸업을 앞두고 학급의 반장을 하던 나는 관비 학생으로 등록금이 필요 없는 사범학교 진학을 희망했으나, 아버지가 없는 결손가정이라 학교 훈도(선생)가 되기엔 부적격하다는 판단으로 학교 당국의 입학 추천을 받지 못해 진학을 포기하고, 중학교와 농업학교는 돈이 없어 입학의 길이 막히자 생각다 못한 나는 장래가 보장되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군수공장인 인천 히타치 공장으로 떠난다.
 공장에서 열심히 기술을 배우고 있는데, 해방이 되며 다시 인생의 앞길을 설계해야 할 기회가 돌아오자, 나는 무작정 상경해서 어렵게 중학교를 마치고, 초등학교 준교사 검정고시를 거쳐 꿈에 그리던 초등학교 선생이 되었으나, 등교 1주일 만에 6•25사변이 발발한다.
  나는 고향으로 피난 가서 정치체제의 변화를 바라보고 있는데, 서울에서 교원으로 있었다고 해서, 반동분자로 분류되어 제거하기 위해 연행하러 온 인민군 정찰병을 어렵게 따돌리고, 9•28수복 후엔 군에 소집되어 국민방위군으로, 현역사병으로, 장교로 6•25사변과 월남전에 참전한다.
  사병 때는 김화의 저격능선 전투에서 중공군과 대치하며 아군의 진내사격 시엔 엄폐된 교통호로 들어가 포탄을 피하고, 장교로 임관해선 정보장교로 월남에 파병되어 베트콩 소굴을 소탕하고, 대대 규모의 베트콩 야습을 물리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
  국내로 돌아와 합참에서 계속 월남전을 수행하다 야전에 나가 국토를 방위하고, 김일성의 남침 야욕이 증가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방어사단 창설에 참여하다가, 육군의 추천으로 청와대로 들어가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 관광지와 회의장을 시찰하고, 국내로 돌아와선 외국에서 견학한 지식을 살려 열악한 관광산업에 접목하여 한국 관광을 국제수준으로 격상하는데 일조를 한다.
  지금은 관광입국(觀光立國)을 목표한지 30년이 지나니 우리나라가 세계 관광산업의 첨단을 달리지만, 옛날엔 관광지다운 관광지가 없고 국제경기장이나 국제회의장이 전무하던 나라가, 이제는 한국에서 관광을 하며 소진(消盡)된 활력소를 재충전 하고, 국제경기와 국제회의를 한국에서 개최하지 않으면 성공을 보장 못한다고 행사 조직 관계자가 우려를 한다.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되고 60여 년이 자난 지금은 살기가 좋아져서, 문맹이나 콩나물교실, 보릿고개와 춘궁기, 징용과 여자정신대란 단어는 국어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단어가 됐다.
  의도적으로 계획한 산행(山行)은 아니지만 일요일(2007.8.26)이라 등산을 결심하고, 서울 북한산 승가사를 찾았더니 등산객이 꼬리를 물고 산으로 올라오는데, 나는 중학교에 다닐 때(1947) 소풍 목적지가 승가사로 결정되어, 담임선생에 이끌려 학생들과 같이 효자동 전차 종점에서 열 지어 승가사를 목표삼아 북한산을 오르던 추억이 회상된다.

  12시가 되니 “댕...,대앵...,대앵...,”하고 산사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리며 식당에선 등산객에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나도 등산객 틈에 끼어 식사를 맛있게 먹는데, 옆에 앉은 어린이는 식사를 못하고 젓가락으로 밥을 끼적거리며 자기 아버지에게, “아빠! 피자는 안 주나?”라고 묻는다.
  해방 직후엔 봄이 되면 초근목피(草根木皮)다, 보릿고개다, 춘궁기(春窮期)다 하던 나라가 60년이 지나니 춘궁기란 단어는 사라지고, 외국과의 무역으로 국민소득이 2만 불이라고 하며, 지난 광복절(2007)엔 ㅇㅇ일보 사설(社說)에서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되고, 건국한지 반세기 만에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운 아프리카 53개국의 GDP(국민총생산고)를 모두 합해도 우리 경제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보도한다.

  운동 경기에선 야구와 축구에서, 골프와 정구, 양궁과 사격에서, 수영과 빙상에서, 한국 선수들의 입상 소식이 연일 보도되고, 최근엔 빙상의 ‘펴겨’ 여자 선수 “김연하”와 수영의 “박태환” 선수가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고 TV와 신문에서 연일 보도하더니, 오늘(2007.11.15) ㅇㅇ일보 A13면에선 미국 프로리다주 세인트 오거스틴에 있는 세계골프명예의 전당(The Word Golf Fall Of)에 현역 골퍼론 최연소자로 “박세리” 선수가 입성했다고 보도하고, A25면엔 “박태환"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국제수영연맹(FINA)” 5차 대회 남자 자유형 400m에서 우승했다고 보도하며, 또 다른 ㅇㅇ일보 스포츠란 A26면에선 빙상의 요정 “김연하”가 올 시즌 빙상의 피겨 최우수 선수로,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고 보도한다.
  TV와 라디오, 신문에선 연일 한국 선수의 우승 소식을 방영하며 알리고 보도하더니, 오늘(2007.12.20) 아침 ㅇㅇ일보 제1면 상단에 “이명박 520만표 차 압승”이란 대문자의 표제와, “17대 대통령 당선...이승만 이후 최대 격차. 한나라당 집권, 10년 만에 우파로 정권 교체, 이 당선자 “겸손한 자세로 국민을 섬기겠다”라는 소문자의 부제로 된 기사가 실려 있다.
  낮 12시, KBS.TV채널 9의 뉴스 시간엔 이명박 당선자가 내•외신 기자 합동회견에서 국정운영 방침을 밝히며, “국민에 대한 담화” 발표가 실렸는데, 요지를 간추리면 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로 가자는 호소다.   

  우리나라가 경제대국(經濟大國)이오, 스포츠 강국이 되고, 사회에선 2만 불 고지를 넘어 3만 불 고지를 향해서 뛸 때,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경제를 살리고 국민통합을 이루겠다고 다짐하며 국민소득 4만 불 시대를 약속하고, 외국 언론에선 불도저 대통령 후보가 당선됐다는 제목으로, 이명박 후보의 선거운동과정과 그 결과를 상세히 보도한다.

  오늘(2007.12.31) 저녁 KBS채널 9의 송년 특집 뉴-스 시간엔 그동안 보도한 체육 선수 외에, 남자 골퍼의 최경주가 금년 씨-즌 2승을 거뒀다고 추가로  방영한다.  
    새해 들어서도 낭보(朗報)는 계속된다. 아침(2008.01.07)에 배달된 ㅇㅇ일보 1면 상단에 “태극기, 문화재 된다”라는 커다란 제목과, “망국의 아픔도, 건국의 기쁨도 함께 했던...”이라는 작은 글씨의 부제와 함께, 조국 광복 60주년을 맞는 금년 광복절에 각급  기관 박물관에 소장 중인 역사 가치가 높은 33점중에서 후손에게 물려줄 역사성이 있는 태극기를 골라서 국가 문화재로 지정한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상징물인 태극기가 1983년(고종 20) 공식 국기로 채택된 이래, 처음으로 국가 문화재가 된다.
  아시아경기대회가 한국에서 열리기 전까지는 태극기는 국가를 대표하는 평범한 국기로 알았는데, 아시아경기대회가 개최된 1986년 이후론 기쁨의 상징으로 변하며 국민의 나라 사랑 정신을 북돋아 준다.
  아시아경기대회에 이어 1988년의 올림픽경기대회, 2002년 한일월드컵축구경기대회로 이어지며 각종 국제경기대회에서, 태극기는 환희의 상징이오, 애국의 상징,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태극기를 입고, 태극기를 흔들며 선수를 응원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보인다.

  조국이 일본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되자, 국민 모두가 조상의 잘못으로 남의 나라 식민지로 전락하여 국민은 무식하고 조국은 가난한 나라가 되었으나,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뛰어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후손에게 물려주자고 가슴 속에 맹세하던 소원이, 60여 년이 지나니 한류열풍은 세계로 불어가고, 국민들은 가슴에 품었던 소원은 달성했다고 어깨를 넓히며 가슴 뿌듯하게 자랑으로 생각한다.  

  나라 안팎에선 장밋빛 소식만 들려오는데, 나는 고엽제후유증으로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 몸으로 노년이 되니, 또 고엽제후유증이 초청하지도 안했는데 피부병을 가지고 찾아와서 대문에서 기다린다는 전달에, 고통이 나가 손님을 맞을 뿐, 나는 가족에게조차 고엽제후유증의 심방(尋訪)을 알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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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Tue, 01 Jan 2008 15:26:5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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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상급자의 온정</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37</link>
	<description><![CDATA[옛날엔 장교가 되면 전선의 지형을 고루 익히라는 취지에서 2년마다 전후방 근무를 번갈아 하는 교류제도가 있어, 가정생활이 안정됐다고 생각하면 보따리를 싸고 새로 발령된 임지로 이사를 가야 하기 때문에, 생활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항상 돈이 없어 경제에 쪼들린다.
내가 결혼한 지 1개월 만에 전후방 교류 계획에 따라 전방으로 가서 오성산 앞에 주둔한 보병 제3사단 제22연데 제1중대 부중대장으로 보직을 받고, 미처 전선의 지형도 파악하기 전에 매년 실시하는 장교정예신체검사에서 결핵환자로 판정되어 사람보다 먼저 기록카드가 원주에 있는 육군야전병원으로 보내지고, 중대 병적부에도 내 이름이 삭제되어, 군대생활을 하는 장교가 아니라 제대를 앞둔 결핵 환자의 신분이 된다.
나는 기록카드를 쫓아 원주에 있는 육군야전병원에 입원하고, 병원열차를 타고 부산 제31육군병원으로 후송된다.
제31육군병원은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장병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못하고 평생을 국가에서 숙식을 책임지고 수용하는 병원이며, 동시에 군대생활이 적절치 못한 장병이 제대를 위해서 기다리는 대기 기능도 한다.
군의관이 내 X-Ray를 다시 판독한 결과, 전방에서 X-Ray를 잘못 판독했으니 군대생활을 계속 하라고 영등포 보충대로 전속명령을 낸다. 
제31육군병원이 제대를 앞둔 군인 환자의 대기 병원이라면, 보충대는 신체 건강한 장병이 부대로 복귀하거나 제대를 위한 보충대다.
병원에선 대기 환자를 분류하여 집으로 보내거나 보충대로 보내고, 육군본부에선 보충대에 있는 장병을 분류하여 제대와 전후방으로 명령을 내는데, 나는 병원에서 신체 건강하고, 군대 생활에 지장이 없으니 다시 군대 생활을 하라고 영등포 보충대로 전속명령을 받는다. 
경제력 없이 가족을 고향 집에 남겨두고, 전방 부대로 떠난 나는 제대를 위해 제31육군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다시 군대생활을 하라는 명령으로 보충대로 옮기는 짧은 기간에 집에 남겨둔 가족의 안부를 살피니 일상 생활이 말이 아니다.       
어머니는 병석에 누워있고, 신부는 잉태한 태아를 사산한 가운데 식량이 부족하여 나의 귀가에도 환영에 앞서 경제적 부담을 느낀다.
보충대에서 원대복귀 하라는 명령을 받은 나는 원대로 복귀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다가 5일간의 이동기간이 만료되어 탈영 장교의 신세가 된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고 한강 백사장으로 나가 쉴 장소를 물색하노라 강변을 배회하는데, 3월 중순이라 결빙된 얼음이 녹으며 덩어리가 하류로 떠내려 온다.
6.25사변으로 폭파된 철교가 복구되지 않아 나룻배가 한강을 오가고, 백사장 통로에선 헌병과 경찰관이  도강하는 사람을 감시하고 있다. 
군데군데 결빙(結氷)된 얼음덩어리가 하류로 떠내려 오는데, 얼음 밑에 사람의 시체가 붙어서 떠내려 온다고 강변에 있던 사람이 빙괴(氷塊)로 모여든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도 현장에 달려가니, 치마저고리를 입은 젊은 여인의 시체인데, 얼굴 모습은 멀쩡하나 겨우내 얼음 밑에 있어서 그런지 손가락이 변형되어 길게 늘어져 있다.
얼음 밑에 붙어서 부유(浮遊)하는 시체를 본 나는 마땅한 휴식 장소를 물색 못하고 시내로 돌아온다.
종로 2가 “황금” 다방에 앉아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는데 밤은 깊어가고, 넓은 홀 안에는 나 혼자 남아서 깊은 사색에 빠졌는데, 40대 후반의 남자가 다방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내 가까이 다가와서 하는 말이, 사회가 불안한 세상이니 관상을 보라고 한다. 
나는 돈이 없어 관상을 못 본다고 거절하니 관상쟁이는,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 될 상이니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가시오”라고 용기를 주며 다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나는 “쉴 장소를 물색하러 백사장을 배회한 사람에게 허튼 소리를 한다”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비어있는 커피 잔을 앞에 놓고 깊은 사색에 빠졌는데, “수양산 그늘이 안동 80리를 가린다”라는 속담이 떠오르자, 나는 인생의 종착역에 내린 내가 가야 할 목적지도 없고, 장래를 설계할 용기도 없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도 없이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현실을, 높은 사람에게 하소연 하면 헤쳐 나갈 길이 열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다음날 오전에 용산에 있는 육군본부를 찾아가서 참모총장실로 들어가려니까 문 앞에서 집무하던 대령 계급장을 단 보좌관이 방문 목적을 묻는다.
내가 대답하기를, “부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은 장교인데, 가정이 복잡하여 부대로 복귀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방황하다 탈영 장교의 신세가 됐습니다”라고 하자 보좌관 하는 말이, “장교가 그와 같은 약한 마음으로 어떻게 군대생활을 하느냐” 라고 힐책한다.    
  나는, “부대 근무도 가정이 안정돼야 성실한 근무를 기대하는데, 가정이 복잡하니 성실한 근무가 안 됩니다”라고 대답한다.   
 보좌관은 “장교 희망대로 조치하겠으니 부대로 돌아가 열심히 근무 하시요”라고 한다. 
나는 탈영 장교이니 부대로 복귀하면 성실한 부대근무 이전에 육군형무소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서울 거리를 또 방황한다.
참모총장 보좌관에게 살려달라고 호소한 지 1주일 만에 원대복귀 명령이 취소되고, 영등포 보충대로 전속한 지 2주일(1957.4.18) 만에, 경북 대구에 있는 육군정보학교(校長 金判植 大領)로 전속 명령이 나서, 나는 보좌관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고향으로 내려가 가족을 대동하고 임지로 향한다.
50년이 흐른 지금 보좌관의 이름은 잊었으나 행복한 노후를 즐기리라 믿는다.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Fri, 09 Nov 2007 06:16:49 +0900</dc:date>
	</item>
	<item>
	<title>전우는 떠난다</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36</link>
	<description><![CDATA[  지난여름(2007.6.16) 서울에 사는 상호 동기생 심 중령(沈榮秀 中領:豫備役) 가족으로부터, 심 중령의 집들이(安葬式)를 대전에서 한다고 초청장이 왔는데, 심 중령은 지난 ‘안보 관광의 날(2006.9.19)’에 만났을 땐 “집을 떠나온 지 60년이 지난 이제야 고향에 갈 수 있는 길이 보인다”며 미소 짓던 그가, 사업을 중단하고 고향(평안북도 신의주)으로 가는 소원을 단념한 채, 대전에 있는 집(현충원)으로 내려간다.
  심 중령은 16세 되던 해에 평안북도 신의주 중학교 2학년(舊制)에 다니다, 반공운동(신의주학생사건)에 가담(1945.11.23)했다는 죄로 공산당의 검거가 시작되자, 단신으로 38선을 넘어(1945.12) 서울로 와서, 낮에는 신문을 팔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며 모진 고생을 하다, 국방경비대에 사병으로 자원입대(1947.5)하여 38선 바로 밑(경기도 웅담읍 감악산)에 있는 부대에 배치되어, 복무를 하다 인민군의 남침(1950.6.25)으로 전투를 하며 경북 대구까지 밀리며 부대 근무를 하던 용사다.
  다부동(경북 칠곡군) 방어선을 지키며 인민군의 대구 침공을 저지하던 심 중령은, 미국의 맥아더 원수가 UN군을 거느리고 인천에 상륙(1950.9.15)하여 서울을 수복(1950.9.28)하자 아군도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고, 그가 속했던 부대(육군 제2사단)도 평양을 거쳐 운산(평안남도)까지 다녀오는 길은 가시밭길이었으며, 두 번 다시 생각도 하기 싫은 험악한 길이었다고 머리를 썰레썰레 내두르고, 장교로 임관되어 20여 년간 전후방 각 부대를 돌며 조국을 지키다 군복을 벗고(1977.3)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30년을 지내다 생을 마감한다.
  현충원 제단(祭壇) 아랜 200여명의 유가족이 손을 모으고 경건히 의자에 앉아 있고, 단상 제단에는 태극기를 입은 18명의 노인들이 앉아서 현충원장이 마이크 앞에 서서 노인들이 나라에 바친 충성심을 찬양하고, 노인들은 현충원장의 조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다.
 불교 의식으로 제사를 올리고, 승려의 독경을 마지막으로 노인들은 영현 봉송병의 가슴에 안겨 천천히 제단을 내려와 묘역으로 향한다.
  장송 행렬이 장교 묘역과 사병 묘역으로 갈리는데, 장교 묘역으로 향하는 호송병은 세 사람으로, 상호도 장송(葬送) 행렬의 뒤를 따라가며, “심 중령은 젊어선 고생을 했을망정 나라를 위해서 영광되고 보람 있게 살다 간다”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장교 묘역에서 유골 안장의 제사를 지내고, 정문을 나서며 넓은 들판을 바라보니, 나라의 부름(召集令) 받은 젊은이가 전쟁터로 떠나며 심은 번영나무 묘목이 비와 서리를 맞으며 거목으로 자라서, 뒤따르는 군의 후배뿐 아니라 일반 사회의 시민들까지 열매를 따 먹는다.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Sun, 04 Nov 2007 07:42:37 +0900</dc:date>
	</item>
	<item>
	<title>6.25사변이 발발하자 국민방위군에 소집되어 6.25사변과 월남전에 참전한 한 노병의 외침</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35</link>
	<description><![CDATA[한•일 합방(1910.8.22)으로 한국은 일본의 식미지로 전락하여 36년간 통치를 받으며 나라 없는 국민의 설움을 겪다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1945.8. 15)하며 우리 민족은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북쪽에서 김일성이 남쪽을 적화하겠다고, 군대를 동원하여 탱크를 앞세우고 따발총을 휘두르며 38선을 넘어 남쪽을 침공(1950.6.25)하자, 나라를 구하겠다고 글 쓰던 학생은 펜을 던지고, 풀 깎던 초동은 낫을 던진 채,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아....이슬 같이 죽겠노라”라고 군가를 부르며 전선으로 달려가고, 피아의 군인이 남•북을 오르내리며 싸우다가 전선이 38선 일대에서 고착되자, 서로가 전쟁을 해도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정전을 의논하며 협의사항이 합의되어 3년여에 걸친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포성이 멈추고(1953.7.27), 변하는 국제정세에 따라 일부 군인은 나라의 명령으로 월남전에 참전했습니다.
  6•25사변이 발발하고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니, 전쟁을 모르는 젊은이는 열악한 장비와 처참했던 당시의 상황을 모르고, 스위치를 눌러 과학무기로 싸우는 현대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족상잔의 6•25사변에 참전하고, 나라의 명령으로 월남전에 참전하며 살아남은 젊은이도 늙어서 저 세상으로 떠났거나 떠날 준비를 하고, 전쟁을 모르는 젊은이 가운데는 6•25사변이 북침이고, 우리의 주적은 미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서, 과거의 어려웠던 생활이 우리 기억에서 잊혀지기 전에 누군가가 기록으로 남겨야 하겠기에, 제가 현대사의 와중(渦中)에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되어, 이상호라는 필명으로 우리 세대의 삶이 자의로 살아온 생활사라기보다는, 온 국민이 겪어야 했던 나라의 운명이라는 사실(史實)을 부각시켜, 유관 기관장과 관련 인사의 사실(事實) 확인과 추천사를 받아, 당시의 사진을 곁들여 동 시대를 살아온 노인들의 공감을 기대하고, 과거를 모르는 젊은이의 이해를 바라며, 2003년 8월 13일부터 2007년 9월 30일까지 국사모(국가유공자를 사랑하는 모임 <a href="">www.ymvetetran.con)</a> 게시판 정보마당, “박경화가 말하는 노병의 독백” Site에 올린 글 중에서 독자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글을 골라서, “소용돌이”라는 주제와 “일본의 식민지 통치, 6•25사변과 월남전쟁, 세계로 부는 한류열풍”이란 부제로 원고를 정리하여 10월 1일 국군의 날을 기념해서 세상에 내놓습니다.


                             2007년 10월 1일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Sat, 29 Sep 2007 02:38:35 +0900</dc:date>
	</item>
	<item>
	<title>DMZ와 NLL를 생각한다</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31</link>
	<description><![CDATA[6•25사변이 종전되고, 전선에서 포성이 멈춘 지 50여년이 흐르니, 위정자의 생각에 따라 DMZ와 NLL의 개념이 희미해진다.
DMZ는 육상에 그어진 휴전선이고, NLL는 해상에 그어진 휴전선인데, 최근엔 DMZ는 말이 없는데, NLL는 영토개념이 아니라 해상에 그어진 가상의 경계선이라 재고할 여지가 있다는 위정자의 말을 듣게 된다.
DMZ나 NLL를 설정할 당시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위정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 이해는 가지만, 육상의 휴전선이 서부는 위도 상으로 38도선 이남으로 형성되고, 동부는 38도선 이북으로 형성되었으며, NLL는 육지의 휴전선을 연장한 선상에 그어진 해상 휴전선이다. 
나름대로 그 원인은 있지만, 서해에선 연평도를 기지로 소속은 미군 첩보부대 요원으로, 8240부대라는 군번 없는 한국의 젊은이가 비행기를 타고 적진 후방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어, 주요 시설을 파괴하거나 첩보를 수집하고, 격추된 미 공군 조종사를 구출하며, 해안으로 철수하여 대기하고 있던 미 해군 함정에 승선하고 기지로 돌아온 용사들이며, 동해에선 속초를 기지로 8250부대란 명칭으로 같은 임무를 수행한 용사들이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적진 후방에 낙하한 젊은이가 살아서 돌아오는 확률은 10%도 안 됐는데, 그 경계선을 내용도 모르는 젊은 세대의 높은 양반들이 원리원칙을 따지고 그 타당성을 언급한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가면 살아남은 대원들이 친목 단체를 조직하고, 애국정신으로 뭉쳤던 당시를 회고하며 조국이 발전한데 대해 홀로 만족해한다.
우리는 6•25사변에 희생된 62만 여명의 희생자와 그 그늘엔 군번 없는 우리 젊은이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Wed, 12 Sep 2007 03:55:07 +0900</dc:date>
	</item>
	<item>
	<title>不請客枯葉劑後遺症</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30</link>
	<description><![CDATA[내가 월남에서 귀국 한 것은 1970년 10월이다.
1977년 봄에 군대에서 제대를 하고 기업체에 취직을 하려고 신체검사를 하는데, 혈앞이 높고 당뇨가 약간 비친다고 해서, 현역 군인이라 동정을 간청해서 신체에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취직이 되었다. 
헌대 10년이 지나면서 뇌출혈로 쓰러지며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과거를 잊고 성인병을 치료하며 15년이 지나서야 기억이 회복되었다.
정신이 들고 보니 내가 앓고 있는 질병이 고엽제후유증이란 사실을 알고, 서울 보훈병원의 신체검사를 받고, 고엽제후유증이란 판정을 받아 지금은 국가의 도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일전에 무릎에 종기가 나서 병원엘 갔더니 담당 의사가 80이 넘은 고령인데, 성격이 명랑해서 격의 없는 대화를 했다.
병상(病狀)을 보고 병세가 심하다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벌써 죽었어야 할 몸인데 살아서 고생을 합니다”라고 했더니, 담당 의사는 병상기록을 보고, “죽을 나이도 됐구먼, 하지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나도 6•25사변 때 평안북도 초산까지 진격했는데, 다른 전우는 국립묘지에 누웠지만, 나는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위로를 한다.
알고 보니 그는 육군의 군의감 출신으로 노년에 시간을 보내기 위해 환자를 보고 있다.
나는 몸이 아파 매일 병원을 통원하며 치료를 하는데, 고엽제후유증은 초청도 하지 않았는데, 37년이 지난 지금 잊지도 않고 피부병을 가지고 또 찾아온다.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Sun, 26 Aug 2007 12:26:59 +0900</dc:date>
	</item>
	<item>
	<title>국민희생과 국가보훈</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29</link>
	<description><![CDATA[지금 나이먹은 사람은 일본 식민지 하에서 우민정책으로 배울 학교가 없어서 문맹이 많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서 해빙이 되고, 사상의 대립 등으로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김일성이 남쪽을 적화시키겠다고 탱크를 몰고 따발총을 휘두르며 남침을 하고, 20대 전후의 젊은이는 나라의 명령으로 제2국민병으로 소집되어 3년여에 걸쳐 싸우면서 인민군의 남침을 막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젊음을 나라에 바쳤거나 살아있는 사람도 늙어서 병마에 신음하며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나도 만신 창이가 되어서 아침 저녁으로 약을 먹으며 연명하고 있다.
7월 하순이다.
 늘 먹던 약이 떨어져 서울 보훈병원으로 갔는데, 새로운 병이 아니라서 의사의 진료 없이 약만 탈랴고 약국 앞 의자에 앉아 내 투약 번호가 계시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시간이 있기에 국방일보를 갖어다 내용을 훑어 보니, 재향군인회장 박세직 장군의 칼람이 실려 있다. 
칼람엔 참전 수당이 월 7만원이오, 무공수훈 수당이 월 12만원이라고 하며 현실과는 둥떨어진 보훈 정책이라고 썼다.
국가기관의 장이 그 정도의 불평을 한 것도 고마운 일이다.
다음 광고란을 훌터보니, 전쟁시에 2등중사 이상 장교들에게는 "퇴직수당"을 준다며 수령하지 않은 사람은 고인이나 생존자를 막론하고 2007년 7월 27일부터 2008년 6월 30일까지 신청하라는 공고가 계재되어 있다.
접수처는 국방부 연금과 전화번호 02)748-6681라고 하니 해당자나 유가족은 의심사항이 있으면 1차 문의해 볼 일이다.]]></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Tue, 07 Aug 2007 03:59:32 +0900</dc:date>
	</item>
	<item>
	<title>6.25사변과 정전협정</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28</link>
	<description><![CDATA[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김일성(金日成)”은 남한을 적화 하려고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침케 함으로서 동족끼리 싸워야 하는 6•25사변이 발발하고, 국군은 38선에서 인민군과 싸우며 서울을 거쳐 대전까지 밀리자, 한국을 구하려고 UN의 결의(1950.6.27)에 따라 정예부대로 소문난 미 육군의 “스미스”부대(미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UN군의 선봉으로 부산에 상륙하여 오산 남방에서 인민군과 조우(1950. 7.5)하여 전투를 하였으나 뒤로 밀리며, 국군도 전투를 거듭하며 38선에서 대구의 낙동강방어선까지 밀리고, 인민군은 적화통일을 목표로 부산을 향하여 낙동강방어선을 뚫고 대구로 침공하려 하자, 일본주재 염합군총사령관인 미국의 “맥아더 원수(MacArthur Douglas 元帥 1888-1964)”가 UN군사령관 자격으로 국군과 UN군을 거느리고, 인민군이 남침한 지 82일 만에 인천에 상륙(1950.9.15)하여 서울을 수복(1950.9.28)하고, 대구까지 밀렸던 국군과 UN군도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여 패퇴하는 인민군을 추격하여 38선을 넘어(1950.10.1) 북으로 진격한다.

  중국대륙을 통일(1949.10.1)한 “모택동(毛澤東)”은 국군과 UN군이 쫒기는 인민군을 쫓아 압록강을 건너 중국대륙(만주)으로 넘어오리란 판단 아래, 오랫동안 중국대륙에서 “장개석(蔣介石)”군대와 싸워온 ‘팔로군(八路軍)’과 ‘조선의용군’을 압록강을 건너 만포(평안북도)와 강계(평안북도), 장진(함경남도)까지 진격(1950.10.25)시키고, 일부는 초산(평안북도)으로 진격하며 한국전에 개입한다.  
  동부전선에서 국군과 UN군이 38선을 넘어 장진과 강계로 진격(1950.11.26)하여 남포를 위협하자, 중공군은 압록강을 향해서 진격하는 아군을 포위하여 함흥(함경남도)에서 퇴로를 차단하고 공격을 개시하며, 서부전선에선 초산으로 진격한 중공군이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수색대와 조우(1950.11.26)하여 전투를 하며 희천(평안남도)에서 퇴로를 차단하고 압박을 가한다.
  국군과 UN군이 인천과 대구에서 반격을 개시한 지 73일(1950.11.27) 만에, UN군사령관(맥아더 장군)은 국군과 UN군에게 전 전선에서 철군하도록 명령을 한다.
  동부로 진격한 국군과 UN군은 흥남항(함경남도)으로 집결하여 미 해군 수송함을 타고 부산항으로 철군(1950.12.5~12.24)하고, 서부로 진격한 국군과 UN군은 도보로 운산과 평양을 거쳐 추위와 싸우며 험난한 산을 넘어 38선 이남으로 철군(1950.12.5)한다. 
  국군과 UN군이 38선 이남으로 철군하고,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여 38선을 넘어 남침을 계속하자, 정부에선 현역과 예비역의 2원제로 운영하던 군사조직을, ‘국민방위군’이란 새로운 군대를 창설하여 3원제로 운영하기로 하고, 만17세로부터 40세까지의 장정을 제2국민병으로 소집하여 전선으로 투입 공산군과 싸울 신병의 자원으로 활용하기로 하고, 입법예고한 ‘국민방위군설치법’에 따라 서울과 경기도, 충청 남, 북도에 거주하는 장정을 소집(1950.12.15)하여 ‘국민방위군’이란 이름으로 경남 고성과 통영, 삼천포 등 해안가 주요도시로 후송하여 휴교중인 각급 학교에 수용하고, 공포(1950.12.21)한 ‘국민방위군설치법’에 따라 새로 창설된 ‘국민방위군’사령관엔 현역 육군준장(金潤根)을 임명하고, 부산으로 피난 온 대한청년단 본부의 간부직을 맡았던 임원들을 ‘국민방위군’에 편입시켜,  일부는 대령 계급장을 달아주며 운영을 맡기고, 대원이 주둔하는 경남 해안가 주요도시에 수용한 각급 학교는 신병을 보충하는 대기 장소요, 송출기관으로 교육대란 명칭을 부여하여 ‘국민방위군’ 중령으로 임관시킨 임원에게 운영을 맡기고, 온양읍의 ‘방위군사관학교’를 나온 방위군소위에겐 각급 학교에 수용한 ‘국민방위군’의 인원관리를 맡긴다.
 
  서울에서 초등학교(孝悌初等學校 校長 鄭儀成) 교원으로 근무하던 나는 6•25사변이 발발하자 고향으로 피난 가서 적치(敵治) 하에서 3개월을 숨어 지내며 사회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데, 공산 치하에서 주권이 회복(1950.9.15)되고, 미국의 “맥아더 장군(UN군)”이 인천으로 상륙하여 서울을 수복하고 치안이 회복되었다는 소문(1950.10.20)을 듣고, 학교로 복귀해 숙직실에서 침식을 해결하며 개교(開校)를 기다린다.
  경향 각지로 피난 갔던 교직원은 복귀하지 않았고, 학생들은 등교를 하지 않아 학교는 본래의 기능을 찾지 못하고 교실(敎室)은 비어있어 유령이 사는 건물로 보인다.
  숙직실에서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1950.12.7)데, 헤드라이트를 켠 UN군 차량이 학교 운동장으로 들이닥치고, 2,3명의 장교가 군화를 신은 채로 숙직실 문을 열더니 잠자리에 들려는 나를 보고 하는 말이, “당신은 영어를 할 줄 아느냐?”라고 묻는데, 나는 이 학교 선생으로 영어는 안다고 대답하자, “우리는 인도군 야전의무대 장교이며, 당분간 이 학교를 접수하여 주둔합니다”라고 한다.
  학교 정문엔 미제8군사령부에서 징발한 건물(EUSAK FOR RESERVED)이란 조그마한 판자가 붙어 있어, 나는 왜 학교 당국의 승낙도 없이 미제8군사령부 임의로 학교를 징발했다는 간판을 부쳤나 의심이 갔었는데, 철군하던 인도군 야전의무대가 미제8군에서 징발한 건물이란 표지를 보고 학교로 들어온다.
  운동장에 개인천막을 치고 하룻저녁을 야영한 인도군 야전의무부대는 다음날 아침 정문에 보초를 세우고 교실로 들어가며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킨다.
  내가 교문을 오가며 용무를 보는데, 인도군은 식사 때가 되면 밀가루를 반죽 해 얇게 밀어 석유풍로(石油風爐)로 구워 ‘C레이숀(미군 야전용 식품)’에서 나온 강낭콩을 얹어 포크나 나이프를 쓰지 않고 오른손으로 먹고, 물 담긴 깡통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날씨가 초겨울이라 노상엔 살얼음이 깔렸는데, 인도군은 수도꼭지에 고무호스를 대고, 물을 받아 옷을 입은 채로 몸을 씻는다.
  알고 보니, 인도사람은 포크나 나이프를 쓰지 않고 오른손으로 식사를 하며, 화장실에서용무를 마친 후엔 항문을 화장지로 닦지 않고 왼손을 사용해서 물로 씻으며, 오른 손은 식사 하는데 만 사용한다고 한다.
  인도는 더운 나라라 옷을 입은 채로 목욕을 하고, 맨손으로 식사를 하며, 화장실에선 휴지대신 물로 항문을 씻는 것이 습관이 되어, 한국에 와서도 습관대로 생활을 한다고 한다. 
  학교로 복귀한 교직원은 영어를 모르고, 보초 서는 인도군 병사는 한글을 모르며, 학교 교실은 인도군 야전의무대가 사용하고 있으니, 학교 교직원이라 하더라도 신분을 몰라 보초는 출입을 금지시킨다.
  아침(1950.12.10)에 자고 나니 3,4일을 학교에 주둔하던 인도군 야전의무대는 밤사이 철수하고 교실은 비어 있다.
  가깝게 지내던 이(李啓植) 선생이 아침 일찍 나를 찾아와(1950.12.12) 하는 말이, “내일 아침 10시까지 탑골공원으로 모이라는 제2국민병 소집영장이 나왔는데, 박 선생에게 작별인사도 할 겸 정든 교실도 둘러보고 싶어서 학교를 찾았습니다”라고 하며, “신체검사를 마치면 기차를 타고 대구 보충대로 내려가 입영절차를 마치고, 한 달 동안 M-1소총의 분해결합과 총기의 조작법을 익히면 전선으로 투입되어 공산군과 싸우게 됩니다” 라고 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하루 종일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린다.
  학교에서 주둔하던 인도군이 철수하고 주인 의식을 되찾은 나는, 숙직실에서 일찍 저녁을 먹고 혼자 곤하게 잠자고 있는데, 새벽(1950.12.18)에 6촌 매부(李庚先)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처남에게 제2국민병 소집영장이 나왔는데, 아침 10시까지 용산 효창초등학교로 침구(寢具)를 가지고 나가라” 라고 한다.
  서둘러 덮고 있던 이불을 말아 배낭에 쑤셔 넣고, 효창초등학교를 찾아가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군인과 같은 복장을 한 대한청년단 단원이 응소자를 모이게 하더니 호명을 하며 중대를 편성하고 말하기를, “정상적인 계획에 따른다면 여러분은 신체검사를 거쳐 합격자만을 기차에 태워 대구 보충대로 보내서 총기 조작법과 군사훈련을 마치곤 현역군인으로 전선에 투입해야 하는데, 중공군의 진격이 빨라 신체검사를 할 시간이 없어, 목적지까지 걸어가서 입영절차를 밟게 됩니다. 여러분은 ‘국민방위군설치법’에 따라 제2국민병으로 소집된 군인이니 명령과 지시에 순응하십시오”라고 말하더니, 대오(隊伍)를 정리하여 앞뒤에 서서 부대를 인솔한다.
  응소자 모두가 학생이나 청년으로 학교나 청년단체에서 제식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인솔자의 명령과 지시에 순응하며 질서는 정연하다.
  부대가 용산을 떠나 덕소초등학교 교실에서 일박을 하고 양평에 도착하니, 주민 모두가 피난을 떠나고 도시 전체가 비어 있다.
  빈 집에서 하룻저녁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니, 부대를 인솔하던 대한청년단 단원이 우리를 집합시키고 말하기를, “여러분의 아침 식사는 양평초등학교 정문 앞에 준비하였고, 다음 목적지는 여주초등학교인데, 용산을 떠날 때 12월 18일 떠났으니 ‘18부대’라 부르고 알아서 남하 하며, 우리는 목적지에서 여러분을 기다릴 것입니다”라고 하며 개인행동을 허락한다.  
  부대가 여주를 향해서 걸어가는데, 오후에 대신면(大新面) 벌판을 지날 때다. 농민들이 무리지어 고구마가 들어있는 가마니를 길가에 내다놓고, “이것은 우리가 농사지은 고구마인데, 인민군이 먹는 것보다는 여러분이 자시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우리도 집을 비우고 여러분의 뒤를 따를 것이니 부담 없이 잡수시요”라고 하며 생고구마를 먹으라고 권한다.
  대신면을 지나며 민가(民家)가 없어 저녁은 굶고, 깊어가는 밤중에 여주초등학교를 찾아 국도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신작로가 끊기고 커다란 하천이 앞을 가로막는다.
  국군이 남침하는 공산군(인민군과 중공군)의 진격을 늦추려고 교량을 파괴하고 철군하니, 양평에서 여주로 이어지는 국도는 여주강을 사이에 두고 교통이 끊긴다.
  여주초등학교를 찾아가야 하는데 물이 깊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얕은 곳을 찾아 강둑 아래위를 헤매다 여울을 만나 먼저 건넌 사람의 뒤를 따르는데, 배꼽까지 물이 올라오니 면도날로 국부를 도려내는 아픔이 온다.
  강 건너에선 먼저 건넌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강물에 들어선 우리를 향해서, “여이샤..., 여이샤” 하며 용기를 준다.
  
  강을 건너 여주초등학교를 찾아간 우리들은 학교에서 일박을 하고, 아침 일찍 정문 앞 책상 위 바구니에 담겨있는 주먹밥 하나씩을 지급 받곤 남하를 계속한다. 
  아침은 오전 7시부터 9시까지, 점심은 11시부터 13시까지, 저녁은 16시부터 18시까지 관공서 정문 앞에서 지나가는 방위군에게 무료로 주먹밥 하나씩을 주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주먹밥은 없어진다.
  잠시 집을 떠난다고 생각 하거나, 군에 입대하는 줄 알고 돈을 넉넉히 가져오지 않은 사람들은, 길가에서 파는 음식물을 사 먹지 못하고, 허기진 배를 잡고 걸어야 하며, 후송하는 ‘국민방위군’ 대열에서 희생자가 많이 생긴 것도 이 까닭이다.
  종착지도 모르고 남쪽으로 10여일을 걸어가니, 노상엔 방위군 대열과 함께 피난민 대열이 하얗게 이어지고, 허기와 보행에 지친 방위군 대원이 군데군데 길가 잔디밭에 누워(죽어) 있다.
  ‘국민방위군’ 대열에 섞여 남하를 계속하던 퍼런 군인작업복의 ‘청년방위대(준군사조직)’ 대원이 누워있는 방위군 대원 가까이 오더니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꼬부리고 잠든 대원을 향해서 거수경례와 묵념을 하더니 돌아서서 오던 길을 재촉한다.
  나는 국도에서 샛길로 접어들어 인적이 드문 청도 뒷산 고개를 넘어 부락으로 진입하려하는데 부락 입구를 지키던 동네 젊은이에게, 부락의 동정을 살피러 온 빨치산으로 오인되어 청도경찰서로 연행되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현장을 도망친다.
  청도 뒷산을 빠져나와 본대와 합류한 나는 마산극장에서 일박을 하고, 진동을 거쳐 18일 만에 고성읍에 당도하니, 어제 오후에 공산군이 서울로 입성(1951.1.4)하고, 서울을 방어하던 국군은, 중공군에 밀려 한강 이남으로 철군 했다고 하는데, 신문에선 중공군 100만 명이 한국전에 개입하여 ‘인해전술(人海戰術)’로 국군과 UN군을 서울에서 밀어냈다고 보도하며, ‘인해전술’이란 술어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제2국민병으로 소집된 장정이 중공군의 진격이 빨라 신체검사를 생략하고 남쪽으로 후송한 대원의 신분은, 새로 공포된 ‘국민방위군설치법’에 따르는 현역군인의 일종이며, 기존 군인은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사람은 예비역으로 편입하여 집에서 쉬게 하는데, 새로 생긴 ‘국민방위군’은 제2국민병으로 소집된 장정이라 예비역 군인의 신분이지만, 군 복무를 마치고 집에서 쉬고 있는 예비역이 아니라 군 복무를 할 예비역으로, 군법을 적용받는 준 현역으로 학교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순서에 따라 전선으로 가서 현역군인으로 편입되어 공산군(인민군과 중공군)과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미리 와 있던 인솔자는 남쪽으로 내려온 우리 ‘국민방위군(용산)’ 600여명을 고성농업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100명 단위로 중대를 편성하여 교실에 수용 한다.
  정문 기둥엔 학교 간판과 나란히 ‘국민방위군’ 제6교육대란 간판이 내 걸리고, 학교에 수용된 방위군은 끼니마다 소금물로 빚은 주먹밥 한 덩이와 국으로 나오는 바닷물로 끼니를 때우며 트럭을 타고 대구 보충대를 거쳐 전선으로 가서, 현역군인으로 편입되어 공산군과 싸울 날을 기다린다. 
  학교 숙직실엔 상인이 들어와 떡(인절미)과 담배(長壽煙)를 파는데, 그것도 돈 있는 사람의 몫이오, 돈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니 눈으로 감상하는 그림의 떡이오, 값비싼 권연(卷煙) 대신 종이로 말아 피우는 장수연인데도 돈이 없어 사 피우지 못하고, 대원들은 뱃속에서 나는 “쪼르륵” 소리를 들으며, 인절미와 담배를 보고도 마른 침만 삼키며 발길을 돌니니 장사는 되지 않는다.
  숙직실 앞에선 방위군 대원이 몸에 지녔던 물건을 돈과 바꾸려고 북적거리는데 돈 되는 물건은 하나도 없고, 겨울철 오후의 스산한 날씨 속에 허리를 구부리고 몸을 웅크리며 교정(校庭)을 배회하는 모습은 춥고 배고픈 군상으로 처량하게 보인다.
  매점과 물물교환장소를 기웃거리던 대원들은, 운동장이나 공터를 배회하며 씀바귀나 냉이, 쑥과 질경이를 뜯어서 날(生)로 먹으며 비어 있는 창자를 채우는데, 어떤 대원은 소화가 안 되어 2,3일을 화장실에 들락거리다 탈진하여 자리에 눕는다. 
  용산초등학교에 근무하던 한(韓相薰) 선생은 운동장이나 공터를 배회하며 나물을 뜯어 빈창자를 채우려는 행동이, “위신이 깎기고, 체통이 안 서는 천박한 행동이다”라고 하며,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라고 들나물(野生草)을 뜯어 빈창자를 채우려는 대원들을 외면한 채, 홀로 교실에 남아 벽에 기대어 졸다가, 기운이 없다고 교실 바닥에 눕더니 영영 일어나지 못한다.
  중대본부에서 자리에 누워있는 한 선생을 치우라고 막걸리 한 동이와 광목 한 통이 나왔는데, 사역을 자청하는 대원이 10명도 넘는다.
  아침이면 밤사이 유명(幽明)을 달리 한 대원의 시신(屍身)이, 가마니로 만든 들것에 실려 밖으로 나가는데, 그 광경을 보는 대원들은 나도 곧 저와 같은 신세가 되리라 생각하며, 담담한 표정으로 시신을 전송한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밤이 깊어가며 취침나팔소리가 들리면, 교실 바닥에 침구를 깔고 공동으로 이불을 덮으며 누워서 두런거리던 속삭임도 잠잠해지고, 모두가 깊은 잠에 빠졌는데 나는 등이 가렵고 굼실거려 잠들지 못하고 살며시 일어나선, 졸고 있는 불침번 앞을 지나 교실 문을 밀고 밖으로 나온다.
  직원변소로 통하는 복도 전등불 밑에서 내의를 벗어 뒤집어 보니, 이(虱)가 하얗게 재봉선 상에 줄지어 붙어있어, 손톱으로 죽이지 못하고 내의를 훌훌 털면, 콘크리트로 된 통로 바닥엔 이가 하얗게 떨어지고, 농구화 신은 발로 이를 비비면 모두 죽는데, 나는 살겠다고 사람 몸에 기식(寄食)하는 곤충인데 하고 연민(憐憫)의 정을 느낀다.

  내 옆에서 침식을 같이 하던 김(金三鳳) 선생은 나이가 40으로, 서울 동구여상(東丘女商)에서 역사를 가르쳤는데, 부인과 12살 난 아들과 9살 된 딸을 남겨둔 채, 제2국민병으로 소집되어 고성까지 남하 했다.
  부인이 남매를 이끌고 피난길에 오르며, 대구와 부산, 마산을 거쳐 한 달 만에 고성 농업학교에 수용된 남편을 찾아내고 면회신청을 했는데, 부인과 면회를 한 김 선생은 교실로 돌아와 친구들에게, “안사람이 면회를 와서 가족과 같이 저녁을 먹고 오겠다”라며 교실을 나가더니 해가 지고 날이 어두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매일같이 오전엔 오락회요, 오후엔 제식훈련이 반복되니, 내겐 전선으로 실려 갈 날을 기다리는 대기시간도 지루하게 느껴지고, 간혹 토끼몰이를 위해서 영외(營外)로 나갈 때는 산 밑 초가집에 사는 어린이가 마당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모습을 보면, 자유가 없는 내 처지와 비교되어 그 어린이의 처지가 부럽게 느껴지고, 야산에서 전개하는 토끼몰이는 수렵물(狩獵物)이 없어도 내겐 아직까지 살아서 움직인다는 현실을 확인시켜 주며, 막혔던 숨통이 탁 트인다.  
  주간엔 제식훈련과 군가로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면 불침번과 위병근무로 군인이 하는 내무생활을 본 따서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날이 밝으며 위병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대원이, 교육대장이 세 들어 사는 위병소 앞 길 건너 기와집 사랑방에서 흘러나오는 ‘맘보가락’의 유성기(留聲機)소리와 ‘사각사각’하고 치마 끌리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제2국민병으로 소집되어 남하한 ‘국민방위군’인데, 같은 방위군으로 사령부에서 임명된 교육대장은 젊은 여자(酌婦)의 손을 잡고 춤을 추며, 양단치마저고리에 오이씨 같은 버선을 신은 젊은 여자는, 교육대장 손을 잡고 아랫목이 검게 끄슬린 장판방을 빙글빙글 도는 모습을 상상하며, 서울에 두고 온 가족의 안부를 몰라 피가 마를 지경이라고 옆에 있는 대원에게 호소한다.  
  오전(1951.3.18)에 서울에서 연희대학교에 다니다 6•25사변이 발발하자, 방위사관학교를 졸업한 중대장(林春在)이, 푸른 작업복 상의 옷깃에 무궁화 잎 하나의(防衛軍 少尉) 계급장을 달고, 민주주의를 옹호하자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는데, 민주주의를 옹호해야 한다며 흑판에 글씨를 쓰려다 돌아서선, “옹호하자는 옹(擁)자의 한자(漢字)를 모르는데 누구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드시오” 라고 하는데 누구 하나 손드는 사람이 없다.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손드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손을 드니, 중대장은 앞으로 나와 흑판에 옹(擁)자를 쓰라고 해서, 앞으로 나가 단상으로 올라가 흑판에다 옹(擁)자를 쓰니, 앉아 있던 대원들이 어린 내가 어려운 한자(漢字)를 안다고 두 손 들고 환호하며 박수를 친다. 

  장정을 제2국민병으로 소집하여 ‘국민방위군’이란 이름으로 군적에 편입시켜 남쪽으로 집단 후송하는 과정에서, 사령부의 방위군 장교들이 후송을 위해 배당된 예산(24억원)과 양곡(5만2천석)을 횡령한 비리가 들어나자 비리를 규탄하는 국민의 여론이 비등하고, 국회에선 ‘국민방위군’의 해산을 결의(1951.4.30)한다.
  ‘국민방위군’이 해산(1951.5.12)하자, 대원들은 쌀 2말과 귀향증(전시엔 당국에서 발행하는 여행증명서 없이는 지역간 이동이 불가능했음)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불 보따리를 등에 짊어진 거지같은 귀향장정이 광대뼈만 불거진 얼굴로 허기진 배를 움켜쥔 채 민가를 기웃거리고, 신작로엔 움직이는 해골의 행렬이 길게 이어진다. 
  정부 당국에선 모든 차량은 국민방위군 귀향장정을 승차 시켜 목적지까지 수송하고, 민가에선 방황하는 귀향장정을 투숙시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편의를 제공하라고 지시를 하고, 날이 저물면 기차역 집찰구엔 행정관청의 공무원이 나와 귀향장정을 집합시켜 민가로 안내한다.
  저녁때 기차를 타고 ‘전주역’에 내리니, 집찰구에서 대기하던 시청 공무원이 우리 일행을 불러 세운다.
  50여명의 대원들은 2,3명이 1개조가 되어 시내 각 가정으로 배치하는데, 우리 일행이 배치 받은 집은 정원(庭園)이 있는 큰 집으로, 우리를 맞이한 남자 주인은 정원 앞에 있는 사랑방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편히 쉬라고 하며 밖으로 나간다.
  저녁에 방으로 찾아온 남자 주인은, 50대 초반으로 차림은 학교 선생같이 보이는데, 나라를 지킨다고 집을 떠난 장정들이 객지에서 고생이 많다고 위로를 하며 찾아온 용무를 말하는데, “서울 사람들은 전라도사람을 ‘개똥쇠’라고 부르며 무시 하는데, ‘쇠’란 남을 낮춰 일컫는 말로서 이번에 전주에 오셨으니 진실을 파악하고, 서울로 돌아가선 인식을 바꿔 주십시오”라고 하며, 전라도사람이 무시당하는 역사적 유래를 설명한다.
 “‘개똥쇠’란 어원(語源)은 전라도 지역의 흙이 모두 개땅(진흙)으로 되어있어, 개땅 지방에서 사는 사람이란 말이 ‘개똥쇠’로 와전된 것이고, 전라도사람을 믿지 못한다고 경원시(敬遠視) 하는 것은, 고려태조 왕건(王建)이 임종(943.4)을 앞두고 심복인 박술희(朴述熙)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치정(治政)에 참고하라”고 훈요10조(訓要十條)가 적힌 유언장을 줬는데, 그 유언장에 적힌 내용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금강(錦江) 이남의 산세와 지형이 배역(背逆)의 형상이라,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은 지형을 닮아 언젠가는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반기를 들을 것이니, 정부의 요직엔 전라도사람을 앉히지 말라고 유언을 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 이후론 전라도사람이 정부의 요직에 등용되지 못하고, 이씨왕조와 일본의 식민지통치를 거쳐, 조국이 대한민국으로 독립된 지금도 전라도사람을 경원시 하는 사고가 남아 있다고 한다.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며 오산(烏山), 장호원(長湖院), 제천(提川), 영월(寧越), 삼척 (三陟) 등 도시를 연하는 선까지 밀리던 국군과 UN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38선 이남으로 철군한 지 43일(1951.3.18)만에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여 38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하니, 이에 당황한 소련정부에선 UN대사 “마리크(Marlk)”에게 한국전쟁의 휴전을 제안(1951.6.23)하도록 지령하고, “마리크”가 휴전을 제의하여 미국이 이에 호응(1951.7.8)함으로서 정전회담이 시작된다.
  정전회담에서 현 전선이 휴전선이 될 것이란 쌍방의 합의로, 지형이 평탄한 서부전선을 맡은 UN군은 소극적인 전투로 전선이 38선 이남으로 형성되고, 지형이 험난한 동부전선을 맡은 한국군은 적극적인 전투로 전선이 38선 이북으로 형성된다.
  정전회담을 시작할 때는 전쟁의 주도권이 UN군에 있었고, 피차의 전력이 비슷(UN군:54만 7천여 명. 공산군:57만 9천여 명)해서 쌍방은 정전의 필요성을 느꼈으나, 정전회담 기간(1951.7~1952.10) 중에 UN군사령관(Mark W. Clark 미육군대장)은 정전의 성사를 위해 일체의 군사행동을 금지시켰으나, 중국의 “모택동”은 전투행위가 없는 틈을 타서 군사력을 증강시켜 피아의 전력이 역전(UN군:71만여 명. 공산군:106만여 명)되자 전쟁의 주도권을 공산군이 장악하고, 정전회담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회담 개시 426일 만인 1952년 10월 8일, 중공군 대표는 ‘포로송환문제’로 UN군과 의견이 대립하자, 자리를 박차고 나오며 회담을 결열 시킨다.  

  UN군사령관은 공산군 대표가 회담장소로 복귀하여 정전회담이 재개되고, UN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회복하고자 정전회담이 결렬된 다음날, 정전의 성사를 위해 중지시켰던 전투행위를, 미제8군사령관(James A Vanfleet 미육군대장)의 건의를 받아드려 재개하도록 허락하고, 미제8군사령관은 한국군 제2사단장(丁一權 陸軍中將)에게 ‘오성산’ 앞 ‘저격능선(狙擊稜線)’으로 진출한 중공군의 전초진지를 공격하라는 명령(1952.10.9)을 내린다.

  ‘오성산(1062)’은 강원도 김화(金化) 북방(7km)에 위치하고 있으며, 철원, 김화, 평강을 잇는 3각지 중심부에 위치한 가장 높은 산으로 중공군 제15군 제133연대가 진출하고 있으며, 그 남쪽에 있는 ‘저격능선’은 김화를 방어하고 있는 국군 제2사단 주저항선 전방(북쪽) 500m거리에 있는 해발 580m에 1km평방키로 미터 넓이의 능선으로, A.B.C고지로 구성된 이 능선은 ‘오성산’에서 남쪽 1.5km지역에 있고, 주봉 A고지(580) 북쪽 50m지역에 B고지가 있으며, B고지 북쪽 300m지역에 C고지가 있고, C고지 북쪽 1.5km지역에 ‘오성산’이 있다.
  ‘오성산’ 남쪽 ‘적격능선’은 중공군 제133연대의 전초진지가 있는 곳으로 전술적으론 중요하지 않으나, 전략적으론 피아의 전력(戰力)을 내외로 과시하기 위해 공방을 되풀이하는 고지다.
  서부전선은 조용한데, 동부전선에선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피아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며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하고, 정부에선 전투부대의 전투력이 약화되자 젊은이가 있는 가정에 붉은 사선(斜線) 2줄이 그어진 제2국민병 소집영장이 발부하고, 거리를 왕래하는 젊은이는 헌병과 순경에 연행되어 집으로 연락할 기회도 주지 않고 훈련소로 보내며,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육군 제1훈련소에서 양성 배출하던 신병의 숫자가 부족하자, 충남 논산에 육군 제2훈련소를 신설(1951.11.1)하여 신병을 양성 배출한다.

  학교로 복귀(1951.7.15)한 나는 애송이 선생이란 허물을 벗고, 3학년 담임에서 고학년인 5학년 여자 학급을 담임(1952.1.10)하고 있는데, 판문점에선 UN군 대표와 공산군 대표 간에 정전을 논의하고 있으니, 전선에서 포성이 멈출 날도 머지않았다고 생각하고, ‘국민방위군’의 병역을 마쳤으니 군대와는 무관하리라 생각하고 있는데, 주위의 젊은이들에게 차례로 제2국민병 소집영장이 나오고, 나에게도 제2국민병 소집영장(1952.2.1)이 또 나온다. 
  논산 육군제2훈련소(所長 咸炳善 陸軍中將), 제21연대(聯隊長 具明會 陸軍大領), 제6중대(中隊長 尹炳俊 陸軍中尉)에서 2개월간, 군가(軍歌)와 불침번 등 군대의 내무생활과, M-1소총의 분해결합과 사격훈련, 철조망 밑을 통과하는 침투훈련과 자동소총의 조작법, 화생방 교육과 각개전투 등 군인의 기초와 상식을 익힌 나는 후반기로 넘어간다.
  신병의 대부분은 모두가 20대 전후로 식민지시대에 출생하여 일본의 우민정치(愚民政治)로 문맹이 많아서, 유식(有識)한 신병을 선발하여 현대식 무기를 다루는 특과학교로 보내고 나면, 후반기 교육은 보병의 중화기 조작법을 익히는 단순한 교육이라 무식자도 훈련을 극복할 수 있어서, 후반기 교육을 받는 훈련병은 대부분이 무식(無識)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常識)이다.
  전북 익산군 금마면에 위치한 제26연대 제18중대(中隊長 李鍾鉅 陸軍大尉)에서 박격포와 무반동총, 기관총과 총유탄 등 중하기의 조작법을 배우고, 토요일(1952. 6.21) 오전에 훈련소 배출대대를 출발하여, 춘천 보충대를 거쳐 다음날 오후에 강원도 김화에서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는 보병 제2사단, 제17연대(聯隊長 殷碩杓 大領), 제1대대(大隊長 姜斗馨 少領) 제5중대(中隊長 金宰東)로 배치 받는다.
 새로 보충된 신병들은 대부분이 문맹인 병사 속에, 보기 드문 중졸의 학력을 인정받은 나는 행정반에서 근무하라며 공급계 조수로 임명되고, 대대 예비대로 후방에서 부대정비를 하던 우리중대는 연대로부터 중공군 전초진지를 공격 점령(1952.10.15)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연대 공격명령에 따라 우리는 밤중에 전선으로 이동하여 공격대기지점에 도착하자마자 각자가 들어갈 산병호를 파서 작열하는 포탄의 파편을 피하고, 동트는 새벽에 공격개시선을 넘어 A고지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다.
  공격개시 전에 아군의 105mm 포탄이 목표를 강타하고, 공격개시 시간이 되자 중대장은 포격을 연신(延伸)하고, 제1,2소대가 공격부대로, 제3소대가 예비소대로 목표 점령을 위해 공격개시선을 넘어 능선을 따라 전진을 하는데, 작열하는 포탄으로 전사자와 전상자가 속출하고, 전상자는 스스로 고지에서 하산하지만 전사자는 후송 할 병력이 없어 공격하던 전우가 전사자의 대검 달린 M-1소총을 거꾸로 꽂아 철모를 얹어 놓곤, 전사자가 있다는 표시를 하고 공격을 계속한다.
  행정반에서 공격부대의 뒤처리를 하던 인사계(高龍洙 上士)가, 공급계 김(金智煥) 중사(병장)와 나를 불러 집결지에 취사장을 설치하여 식사문제를 해결하고, 전사자와 전상자를 파악하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대대에선 전사자 시체를 한 구도 손실 없이 대대로 후송하라고 전화로 독촉한다.
  중대는 정오가 넘어서야 고지를 점령하고, 연대본부에선 노무대원 6명을 중대로 보내는 데, 나는 취사장에서 소금물로 빚어 만든 주먹밥을 카빙소총탄통에 담아 노무자로 하여금 고지를 점령한 중대로 가져가서 소대별로 분배하도록 운반케 하고, 고지를 내려오는 길에 전사자 시신을 수습하여 집결지로 운반하도록 지시를 한다.
  우리 중대의 공격으로 중공군은 C고지에 소대규모의 병력만 남겨둔 채 주력은 북쪽에 위 치 한 ‘오성산’으로 후퇴하고, A고지를 점령한 우리 중대는 진지를 보강하고 중공군의 역 습에 대비한다.
  행정반에서 공급계 조수로 임무를 수행하던 나는, 중대가 A고지를 점령하자마자 제1소대 기관총 사수로 임명되고, 제1소대는 전초소대 임무를 띠고 앞(50m)에 있는 B고지에서 중공  군의 접근을 감시하도록 명령 받는다.
  B고지엔 8부 능선을 따라 깊고 길게 파여진 교통호가 있어, 진지에 투입된 장병은 허리를 꼬부리고 이동을 하며, 소대원은 교통호에 엎드려 중공군의 접근을 감시하고 있다.  
  ‘오성산’으로 후퇴한 중공군은, ‘저격능선’에서 한국군을 몰아내는 것이 급선무라, 캄캄한 야음(1952.10.30)에 우리가 감시하고 있는 B고지를 우회 좌측 계곡으로 침투하여 A 고지를 점령하고, ‘오성산’ 턱 밑에서 중공군의 접근을 감시하던 우리 소대는 본대와 이 어지는 접근로를 차단당한 채, 후속하는 중공군의 공격을 받는다.
  깊은 밤이지만 전선은 작열하는 포탄으로 대낮같이 밝으며, 공격하는 중공군의 검은 그림자가 앞으로 올라오고, 올라오던 검은 그림자가 쓰러져도 뒤따르던 검은 그림자는 쓰러진 검은 그림자의 물체를 밝고 기어오는데, 내가 쏘는 기관총과 병사들이 쏘는 M-1소총은 불을 뿜어대고, 105mm포탄이 앞에서 수 없이 작열해도 중공군의 검은 그림자는 계속 올라온다.
  꼬불꼬불 길게 뻗은 교통호 벽엔 병사들이 엎드려 다가오는 중공군에게 M-1소총을 난사 하고, 깊게 파여진 교통호의 마른 땅바닥이 군데군데 젖어 있는 것은, 그 자리에서 우리 소대원이 쓸어졌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피 묻은 건빵봉지가  여기저기 나둥글어 교통호는 어지럽다. “쾅”하고 포탄이 작열 하는 순간, “아이쿠” 하고 교통호 벽에 엎드려 사격하던 이(李相根) 하사(상등병)가, 주저앉더니 옆으로 쓰러진다.
  나는 “이 하사!”하고 옆으로 쓰러진 이 하사를 안아 일으키며 가지고 있던 손수건으로 이 하사 가슴에서 흐르는 피구멍을 막는데, 이 하사는 고개를 숙이며 숨을 거둔다.
  이 하사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나도 스물둘(22)의 피어보지 못한 꽃봉오리가 강원도 김  화 전선에서 진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인연을 맺었던 얼굴들이 하나둘씩 눈앞을 스쳐간다.
  곤색 교복에 흰색 칼라의 신광여중(信光女中) 5학년이라는 “조경자(趙慶子)” 학생을 일요일 오전에 을지로 4가에 있는 국도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만나면 점심을 같이 하며 속마음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는데, 동족상잔의 6.25사변이 앞을 가로막으며, 또 하나의 얼굴이 겹치는데, 자유로운 복장인 초등학교 학생을 이성(異性)으로 대하기는 나이가 어리지만, 나를 좋아하고 따르던 담임학급의 학생 “김석원(金錫元)” 얼굴이다. 
 나는 삶을 마감할지도 모르는 긴박한 순간에, 20여년을 길러주신 어머니 얼굴대신, 한두 번 만나본 조경자 학생과, 자신을 따르던 김석원 학생 얼굴이 떠오른데 대해서, 납득 할 수 있는 변명을 찾지 못하는 자신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소대장 김(金淳秀) 소위가 오른쪽에서 허리를 꾸부리며 다가와선, “모두 동굴진지로 철수하라”라고 외치며 좌측 동굴진지로 사라진다. 교통호 왼쪽 끝엔 유사시를 대비한 10평방미터 넓이의 동굴진지가 있으며, 사람이 서서 다닐 수 있는 높이의 동굴진지 벽은 4면을 참나무로 총총히 박아놓고, 천정도 참나무를 깔고 2m정도를 흙으로 덮어서, 판자로 된 출입문을 닫으면 사람의 출입이 불가능하고, 소대장 김 소위가 출입문 옆에서 구형(矩形)으로 된 총구를 통해서 바깥 동정을 살필 뿐, 포화(砲火)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요새다.
  B고지 능선을 기어오르던 중공군의 후속부대도, 아군 포병이 쏘는 105mm포탄의 작열과 기관총사격, M-1소총의 난사로 수많은 전사자를 남긴 채 공격을 단념하고 ‘오성산’으로 후퇴하자, A고지를 점령한 중공군의 주력부대는 고립되고, 진지를 정비하느라 날이 밝았어도 소리 없이 조용하다.
  나는 갈매기 둘의 계급장을 단 하사(상등병)로 행정반에서 투입된 기관총 사수지만, 갈매기 하나의 일등병 계급장을 단 “영재(朴榮在)”는 기관총 부사수로, 나는 전선의 분위기를 익힌 고참병 소리를 듣지만, 영재는 후방에서 보충된 신병 소리를 듣는다,   
  내가 “자냐?”하고 고개를 돌리며 총상(銃床)에 머리를 묻고 있는 영재에게 속삭이자, 영재는, “예, 안 잡니다”라고 대답하며 총상에서 부스스 상체를 일으킨다.
 “자지 마, 날이 밝았으니 곧 중공군이 나타날 시간이야”라고 말하며, 나도 감기는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어른스럽게 영재에게 속삭인다.
  “박 하사님, 왜 이렇게 조용합니까? 중대 방어진지가 저희들 수중에 있으니, 전방으로 나와 있는 이 전초소대는 안중에 없는 것 아닙니까?” 하고 영재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그러니 적이 오나 잘 보란 말이다, 중대 관측소가 떨어지고 중공군의 재편성이 끝날 시간이라, 날이 밝았으니 지금쯤은 고지를 점령한 주력부대나, ‘오성산’으로 후퇴한 후속부대나 다음 행동으로 옮길 때가 되었다고 생각 한다”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네 지금?” 하고 영재는 내가 한 말을 되씹는다. “그래 이제부턴 중공군이 나타나면 진지 밖으로 나가 총검으로 찌르고 찔리는 백병전을 벌이던지, 작열하는 포탄이나 중공군이 던지는 수류탄에 맞아 죽는 일만 남아 있어” 하고 나는 영재 말을 담담하게 받아 넘긴다. 
  아침 햇살을 가슴에 안고 능선을 오르는 중공군의 그림자 하나가 총구를 통하여 내 시야에 들어오자, 나는 “따라락...,따라락...,” 하고 기관총 방아쇠를 단기는 데, 기관총 소리의 장단에 맞춰, “시쿵...,시쿵...,쾅...쾅” 하고 공중에서 포탄이 작열 한다. 
  “박 하사, 박 하사, 이상 없나...박 하사!?” 하고  동굴진지 입구에서 중공군의 동태를 감시하던 소대장의 외침이 들려오자 나도 오른쪽에 대고, “예, 이상 없습니다” 하고 큰소리로 외친다.
“알았다, 아군의 TOT사격(진내에서 포탄의 공중폭발)이다. 정신 바짝 차려라, 곧 기쁜 소식이 있을 거다” 하는 소대장의 들뜬 외침이다.
  “아군의 TOT사격”이라는 소대장의 외침이 귓가에서 되살아나는 순간, 나는 중공군과 백병전을 벌리며 상대방의 총칼에 찔리기 전에 내가 먼저 찔러야 한다는 긴장이 풀리며 가물가물 하고 멀어지는 의식 속에, “시쿵...,시쿵...,쾅...,쾅”하는 포탄소리가 포근하게 들리며 눈이 스르르 감긴다.
  집결지로 철군한 우리 중대는 제3소대 ‘선임하사(陳基連 1等中士-하사)’가 특공대(10명)를 조직하여 아침 일찍 주간공격을 감행하여 오후가 넘어서야 고지를 탈환하고, 중대가 다시 방어를 하며, 우리 소대도 A고지로 통하는 접근로가 뚫리고 본대와 연락이 회복된다.
  나는 기관총 사수로 있으면서 하사(상등병)에서 2등중사(병장)로 진급하고, 사병의 신분에서 하사관대열로 끼어든다.
  아침 햇살이 엄폐(掩蔽)된 기관총 진지의 총구를 눈부시게 비치고 있는데, 기둥에 걸린 TS-10(배터리 없는 야전 휴대용 송수화기)에서 “1소대..., 1소대” 하고 소대원을 찾는다.
내가 TS-10송화기에 대고, “감 잡았다. 보내라”하고 응답하니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박 중사님이 대대본부에서 치른 갑종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하여 전남 광주에 있는 육군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됐습니다. 사물(私物)을 가지고 11시까지 대대본부 인사과로 출두 하십시오”라는 중대본부 교육계 이(李東鎭) 하사(상등병)의 전화다.
  중대에선 인사계와 소대 선임하사 등 고급하사관이, 갑종간부후보생 모집 때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길은 죽는 자리를 피하는 일이라며, 육군본부 고급부관실(인사운영감실)에서 나온 모병관(일등상사)이 실시하는 간부후보생 시험을 피해서 자리를 비우는데, 나는 임관되면 소대장으로 부대 선두에서 소대원을 이끌고 적이 방어하는 고지를 오르며 돌격지점에 당도하면, “돌격 앞으로”하고 오른손을 높이 드는 순간, “딱콩”하고 적의 저격병이 쏘는 총탄에 쓰러질 줄 알면서도, 중대장의 엄명(嚴命)이라 대대본부에서 단독으로 치른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했다는 통보로, 서둘러 사물을 챙기고 육군보병학교로 가기 위해 고지에서 내려온다. 
  토요일(1953.4.4) 오후에 각 사단출신 하사관 50여명과 같이, 첫째 칸엔 공비(共匪)의 습격을 대비해서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 1개 분대를 태운 군용열차를 타고, 야간에 강원도 춘천역을 출발하여 밤새 달려 다음날 아침에 전남 광주 ‘송정리’역에 도착, 10리길을 걸어서 상무대로 향한다.
  육군보병학교(校長 崔 錫 陸軍少將)에선 장교를 양성 배출하기 위해 1개 연대(聯隊長 金應伯 大領) 2개 대대, 12개 중대로 교육연대를 편성 6개월의 교육 훈련을 실시해서 매 2주마다 200명 내외를 배출하던 신임장교(新任將校)를, 전선에서 소대장의 소모가 많아지자 비어있는 자리를 채워달라는 일선부대장의 요청에 따라 연병장에 천막을 치고, 1개 대대를 증설하여 현역부대와 훈련소에서 보내오는 간부후보생을 수용하여, 매주 장교를 배출하기 위해 교육훈련을 실시한다.
  나는 갑종간부후보생 제57기로 제3대대(大隊長 洪鶴杓 陸軍少領), 제오중대(中隊長 姜貞綾 陸軍少領), 제2구대(區隊長 慶貴鉉 陸軍中尉) 소속으로 편성되어 교육훈련이 시작된다. 
  거리를 왕래하는 시민들은 작업모에 육군소위 계급장을 단 장교를 만나면, 계급장이 동판에 밥풀 하나를 부친 것과 같다고 해서, 장교라는 영광보다는 전선에서 부대를 이끌고 적이 방어하는 고지를 오르며 돌격선에 도달하면, “돌격 앞으로” 하고 오른손을 높이 드는 순간, “딱콩” 하고 적 저격병의 저격을 받아 쓰러질 몸이라고 해서, ‘하루살이’, 혹은 계급을 무시한 ‘밥풀떼기’, ‘소모(消耗)소위’라고 부르며 동정을 한다.
   상황이 급할 때는 전선에서 소모되는 소대장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200여명의 후보생이 토요일의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육군소위 계급장을 달고, 상무대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고 전선으로 직행하여 비어있는 소대장 자리를 메우며 전열을 가다듬는다.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1953.3.8)하며 세계정세가 변화하자, 중국의 “모택동”은 승산(勝算) 없는 전쟁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정전을 결심하고, 정전을 해야 한다는 본국의 정책을 정전회담 중공군 대표(彭德懷)에게 전달하니, 중공군 대표는 회담의 재개(1953.4.6)를 UN군에 요구하고, 회담 결렬 182일 만에 양측 대표가 판문점에 다시 모여 합의를 보지 못한 의제 제4항 ‘포로송환’문제를 토의한다.
  한국정부에선 정전을 반대한다는 결의를 하고, 육군보병학교 교실에선 교관이 M-1소총의 성능을 가르치며 후보생의 전기(戰技)를 연마(硏磨)하여 전투에 대비하고 있는데, 위병소 앞에선 매일같이 시민이 ‘푸래카드’를 들고 정전반대 시위를 하고, 조야(朝野)가 하나같이 정전을 반대하는 가운데 판문점에선 UN군 대표와 공산군 대표 사이에 정전을 논의한다.    정전회담(1953.7.21)에서 쌍방 대표들은 의제 제4항 ‘포로송환문제’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고, 중국의 “모택동”이 합의사항에 동의하며, UN군사령관(Ridgeway미육군대장)이 합의사항을 승인하자, UN군 대표와 공산군 대표들은 7월 27일 정전협정에 조인하고, 동족상잔의 6.25사변이 발발 한 지 3년 여 만에 정전이 되며 전선에서 포성이 멈춘다.
   당국에선 전쟁의 승리를 위한 정책을, 포격과 폭격으로 건물의 잔해만 남은 도시의 재건과 토탄에 빠진 민생을 안정시키는 정책으로 전환하고, 신임장교(新任將校)도 각자 고향으로 내려가 10일간의 휴가를 보내도록 군사정책을 변경하니, 나도 졸업식(1953.9.19)을 마치곤 10일간의 휴가를 즐기려 어머니가 기다리는 고향(忠南禮山)으로 내려간다. 전쟁 중엔 육군소위는 ‘하루살이소위’라고 비하(卑下)하던 대명사가, 정전이 조인되고 전선에서 포성이 멈추니, ‘국제신사’라는 대명사로 바뀌며 사회에서 귀한 존재로 부상(浮上)한다.

보충설명:6•25사변 때는 사병의 신분을 병(2등병, 1등병), 하사(상등병), 하사관(병장, 하           사), 고급하사관(중사, 상사, 원사) 등으로 분류하였음.

참고도서: 한국전쟁 개요(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발간).
              한굳사 대사전(교육도서 발간).
   
1. 정전회담의 의제 및 합의사항. 
  (1). 협상제목 채택
  (2). 군사분계선의 설정
  (3). 휴전 감시방법 및 그 기구의 설치
  (4). 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 
  (5). 쌍방 당사국 정부에 대한 건의
2. 국민방위군:전시 또는 사변에 있어서 병력동원의 자원을 확보하고, 배출의 신속을 기하기 위해서 설치 조직된 군대임.
3. 국민방위군사건:1950년 12월 21일 공포된 ‘국민방위군설치법’에 따라 신설한 방위군을 후송하는 과정에서 반위군 갑부들이 국고금 24억원과 양곡 5만2천석을 횡령하여, 1950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은 해산하고, 사령관 김윤근(金潤根) 육군준장과 방위군 대령 등  4명이 총살 된 사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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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Wed, 18 Apr 2007 05:45:35 +0900</dc:date>
	</item>
	<item>
	<title>수필집 저자에게 보내는 독후감</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27</link>
	<description><![CDATA[독후감
보내주신 수필집은 잘 읽었습니다. 저보고 책을 읽고 난 독후감을 알려 달라고 하셨는데, 저는 독후감을 말 할만한 지식이나 권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권 여사님이 펴 낸 “히부라인의 합창”을 읽고는,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 오늘을 살며, 낙화유수 같은 추억을 더듬으며 펴 낸 문장을, 소용돌이와 홍수, 폭풍과 태풍 한가운데 서서 거친 물살을 헤치며 살아온 저에게, 잉어와 붕어를 보고 느낀 소감을 묻는 질문 자체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잉어와 붕어는 모르지만 이름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굳이 독후감을 말 하라면, 화문비단(花紋緋緞) 의상을 입고 당혜(唐鞋)를 신은 여인을, 마의(麻衣)를 입고 마혜(麻鞋)를 신은 사람이 바라보는 격입니다.
  젊어선 홍수로 떠내려간 가재도구를 장만하며 태풍으로 폐허(廢墟)가 된 부락을 복구하겠다고, 홍수나 태풍을 모르는 이웃동네로 달려가서 치산치수(治山治水)와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곤, 집으로 돌아와서 살림을 장만하고 굴삭기를 운전하여 쌓인 토사(土砂)를 밀어낸 작업이, 폐허가 된 부락을 가래질로 농로를 내고, 외부로 통하는 길을 만들어 이전보다 살기 좋은 부락을 만든 동네 사람들의 노력에 일조(一助)를 했다고 스스로 자부(自負)하며 만족하고 있습니다. 
제 비유가 적절(適切)한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권 여사님 좋으신대로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편지엔 좀 더 공감이 가는 글이나 소식을 전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책을 다 읽었다는 소식을 알리며 건강에 조심하시고, 내내 안녕하시기 바랍니다.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Sun, 07 Jan 2007 10:09:17 +0900</dc:date>
	</item>
	<item>
	<title>주인 찾은 무공훈장</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25</link>
	<description><![CDATA[   지난 정초에 상호가 성묘 차 고향으로 내려가 가족묘지에서 성묘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데, 한 신사가 상호를 기다리다 다가오더니, 40년 전에 사망한 이재준의 조카라고 하며 이재준이 어느 전선에서 어떻게 부상을 했는지 그 내용을 알려주면 대구에 살고 있는 가족에게 그 사실을 알리겠다고 고인의 병적을 묻는다.
  상호는 대답하기를, “이재준은 내 어렸을 때 친구지만 그의 병적은 나도 모르니, 집에 가서 아는 데까지 알아서 알려 주겠습니다”하고 신사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즉시 육군본부 부관참모부로 민원을 올려 고인의 성명과 주소를 기재하여 병적을 문의하였더니, 한 달 후에 육군참모총장 이름으로 답장이 왔는데, 이재준은 경북 안동지구 묘향산 전투 때 소대장으로 전공을 세워 화랑 무공훈장을 수훈 했는데, 그가 수훈할 화랑무공훈장은 미 수령 상태라는 회신을 받았다.
  즉시 육군참모총장의 회신 내용을 신사에게 우송했더니, 신사는 다시 대구에 사는 고인의 가족에게 그 사실을 알려서, 고인의 가족은 국가보훈청 대구지청에 신고하여 지금은 국가유공자의 유가족으로 국가에서 여러 가지 보훈혜택을 받고 있다며 감사하다는 전화와 함께, 인사 차 상경하겠다고 한다.
  상호는 전화를 받고, 친구는 타계하고 상호는 건재하니, 원인을 제공한 상호를 보는 유족의 심정은 불편하리라 짐작하는 데, 며칠 전에 전화로 인사차 상호네 집을 방문하겠다고 하더니, 오늘(2006.10.21) 오후에 “딩댕동” 하며 초인종이 울린다.
  상호가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이재준 부인과 낯선 넘자 둘에 여자 둘이 서 있다.    
  상호는 정중하게 안내하여 거실로 인도하니, 낯 선 남녀 네 사람은 이재준의 아들과 며느리라고 하며 큰 절로 인사한다.
  상호는 불현듯 고인과 지나던 지난날을 회상한다.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이 되고, 자유를 찾아 너도 나도 서울로 상경 할 때, 고인과 상호도 서울로 왔으나 당장의 호구(糊口)가 어려워 고인은 국방경비대로 자원입대하고, 상호는 자취를 하며 낮에는 유리제품 행상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 나갔다.

  의정부에 주둔한 보병 제18연대에 배치된 고인은 일요일이면 의정부에서 서울로 나와, 낮 동안을 쉬면서 훈련을 받느라 시간이 없어서 발톱을 깎지 못했다며, 발가락 밑까지 자라 내려간 발톱을 깎던 고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고인의 가족들은 고인을 타계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상호에게 불평을 하는 표정이 아니라, 고인과 가까웠던 친구를 찾았다는 반가운 표정이다.   

  6.25사변이 발발하고 고인은 장교로 임관하고, 상호는 제2국민병으로 소집되어 논산훈련소로 입소했는데, 50여년이 지나니 고인은 산에 누어있고, 상호는 집에서 건재한 생활을 한다.  



참고 : 향로봉전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발간)  
  1950년 8월 15일부터 24일까지 한국전이 교착상태에 빠진 직후, 한국군 수도 사단과 제11사단이 강원도 북부 향로봉(해발926m)에 배치된 인민군(제13사단, 제45사단)을 격퇴하고 ‘남강’으로 진출한 공격전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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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Sat, 28 Oct 2006 18:20:12 +0900</dc:date>
	</item>
	<item>
	<title>광복 제61주년 기념일</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24</link>
	<description><![CDATA[  오늘(2006.8.15)은 61년 전인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식민지 통치와 인적, 물적 수탈로 도탄에 빠졌던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던 날이다.
  그날은 일요일이라 기숙사 앞에 있는 바닷가 갯벌로 나가 조개자비를 하려던 계획이, 정오에 천황의 특별방송이 있어서 교실로 모이라는 사감선생의 전달에 조개자비를 취소하고, 교실에 모여앉아 천황의 방송을 듣던 장면이 엊그제 있었던 일 같은데, 벌써 61년의 세월이 흘렀다.  
  1953년 1인당 국민소득이 67달러이던 가난한 농업국가가 52년이 지난 작년(2,005)에 통계청이 발표한 1인당 국민소득은 243배가 늘어난 16,291달러이며,  나라 살림도 지난 1,948년 2,200만 달러였던 수출이 지난해 2,244억 2천만 달러로 2,900배가 증가하고, 세계 무역에서 우리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1,960년에 0,03%에서 2,9%로 세계 10위권으로 부상하고, 국토 면적도 지난 1,949년 9만3천6백여 제곱킬로평방미터에서, 간척사업 등으로 확대되며 지난해에는 9만9천여 제곱킬로평방미터로 6,4%가 증가했다.
  총인구는 1949년 2천18만9천여 명에서 지난해 4천8백29만4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지난 1,949년 유선전화 가입자가 천 명당 2명에 불과하던 것이, 지난 2천4년엔 2명 중 1명이 가입하고, 자가용도 1,970년 100가구 당 1가구가 보유하던 것이, 작년엔 10가구 당 9가구가 보유하고 있다고 오늘(2006. 8. 14) 발표한다.  
 세계 여러 나라에선 우리나라를 농업빈국이 아닌 IT강국으로 부른다. 금년(2,006)엔 사회에 훈풍이 불며 모든 나라로부터 IT강국, 경제대국이란 소리를 들으며, 국민생활은 향상되어 장래의 희망을 설계하고 목표를 향해서 뙬 때, 내 집 담장 무궁화나무도 물이 오르며 꽃이 활짝 피고, 나도 희망을 설계하고 매일의 생활을 즐기고 있다. 
 
   무궁화는 우리 민족을 상징하며 어느 꽃보다도 우리 주변에 가깝게 다가와 친근하게 느껴지며 은근하고 겸손하다. 한국을 은자(隱者)의 나라라고 부른다면 무궁화 꽃은 요염한 색채나 향기도 없는 꽃이며, 점잖고 겸허한 군자의 풍모를 갖췄으므로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꽃 에 손색이 없고, 나라를 상징하는 국화(國花)로 삼기에도 충분하다.
  일제 식민지 하에선 무궁화나무 입새를 벌래가 갉아먹고 진딧물이 들어 꽃나무는커녕 식물 축에도 못 들고 사람으로부턴 외면 당하던 나무였는데, 36년간의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이 된 지 60여 년이 지나니, 우리 민족 모두가 무궁화나무를 민족을 상징하는 꽃나무로 생각하게 되었다.
 인류는 예로부터 생계(生計) 다음으로 꽃을 좋아하고, 무궁화는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가 자연발생적으로 좋아하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겨울철을 제외 하곤 빨간색, 흰색 등 단조로운 색채에 번식력이 강한 다년생 관목(灌木)이다.
  나는 담장을 무궁화나무로 꾸몄는데. 매년 광복절을 전후해서 피고 늦가을에 지는 무궁화 꽃이 특색이 없으니 무심코 넘어갔는데, 금년(2,006)엔 꽃에 윤기가 흐르고, 붉고 흰 아름다운 모양에 둥근 자태를 뽐내니 지나가는 행인들의 관심을 끈다.

  일본 식민지 통치를 받으며 나라 없는 설움과 멸시를 받던 한민족(韓民族)이 해방되고 60여 년이 지나니 자기주장을 목청껏 외칠 수 있고, 방방곡곡(坊坊曲曲)에 심어진 무궁화나무에선 꽃이 활짝 피고 윤기가 흐른다. 
  돌아오는 해에는 보다 아름다운 무궁화 꽃을 감상 하려면, 오늘을 사는 젊은이가 무궁화동산을 예쁘게 가꾸고 다듬으며, 거름을 주어 풍요로운 나무가 자라는 꽃밭을 만드는 일이며, 어제의 주역들은 뒤로 물러앉아 꽃밭 가꾸는 것을 지켜볼 일이다.

  무궁화나무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꽃나무라면, 태극기는 우리나라를 상징 하는 깃발이다. 
  1986년 9월 서울에서 열린 하계아시아경기대회를 시작으로, 1988년 9월 서울 에서 개최된 하계올림픽대회, 1999년 1월 강원도 용평에서 개최된 동계올림픽대회, 2002년 6월, 한국과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축구경기대회에서 우리나라가 4강에 오르며 우리의 체력과 국력을 만방에 과시했다.
  2006년 6월, 독일에서 열린 월드컵축구경기장 응원석엔 대형 태극기가 붉은 악마 머리 위를 물결치며 흐르고, 손에 쥔 태극기를 흔들며 선수를 응원했다.      
  7월 18일자 ㅇㅇ일보 A10면엔 법무부가, 해외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외국 여권을 가지고 국내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 후손 11명을 마음 놓고 조국에서 거주하도록 특별 귀화를 허가했다고 보도한다.
  이제는 농업빈국이 아니라 선진 IT강국으로, 국내외에서 한국 국력의 막강함을 과시한다.
 어제 조간 ㅇㅇ일보 A8면 하단에는 커다란 활자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친일파 재산 환수 조사委 출범
18일부터 400여명 직권조사
 친일파 재산을 되찾기 위한 대통령 산하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위원장 김정국)가 오는 18일 서울 충무로 극동빌딩 6층에 마련된 조사위 사무실에서 현판식을 열고 공식 출범한다.
  1949년 반민특위 해산 이후, 대물림 된 친일파 자산에 대한 국가 차원의 환수 작업이 57년 만에 재가동되는 것이다.
  조사위는 을사 5족 등 친일반민족 행위자임이 명백하고 친일활동의 대가로 토지 등을 획득했을 것으로 보이는 친일파 400여 명의 후손들이 보유한 재산을 국고 환수 우선 대상으로 정하고 직권조사에 들어갈 계획이다.
  조사위는 위원장과 상임위원 2명 등 9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와 법무부, 경찰청, 재경부 등에서 파견된 공무원 등을 포함해 모두 104명으로 구성된다. 조사위는 최근 공식 출범에 앞서 예비조사를 벌여 ‘을사5적’ 이완용의 후손이 국가 상대 소송에서 이겨 소유권을 인정받은 재산 2건과 친일파 이재국, 민영휘의 후손이 같은 방법으로 획득한 재산 2건에 대해 조사개시 결정을 내렸다.
  
  작년의 광복절(2005)엔 서울시청 건물 전면이 3,600여 장의 태극기로 덮더니, 금년엔 검은색, 청색, 적색의 청사초롱 13,000여 개로 불을 밝히고, 바람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만들었다.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이 있는 이상, 대한민국은 영원히 번영 할 것이다.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Tue, 15 Aug 2006 02:12:52 +0900</dc:date>
	</item>
	<item>
	<title>식민지 국민의 설음</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23</link>
	<description><![CDATA[  일본인 실업자가 관부연락선(關釜連絡船)을 타고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사람 이 종사할 일자리를 독점하니, 한국인은 생활을 유지할 일자리가 없어지고, 농토는 일본의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 소유로 넘어가서, 농업은 마비되어 한국인은 빈궁(貧窮)하고, 일자리 잃은 사람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전국을 떠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사람이 글을 배워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알면, 일본의 식 민지 정책을 반대하고, 독립을 요구한다고 배울 기회를 박탈하고, 우민정치(愚民政治)를 실시하니 한국인은 무식하고, 일본 사람이 한국 사람을 대하는 태도 는 인간이 동물을 상대하는 태도와 같다. 
  학교 잔디밭이나 공원 잔디밭엔, ‘개와 고양이 외에는 출입금지’라는 팻말 을 세워놓고, 그것을 보는 한국 사람은 일본사람이 세운 팻말이라, 한국인을 동물시 하는 글귀도 그러려니 하고 당연시(當然視) 한다. 지각 있는 사람이 일본 정부에 대해 인간다운 대우를 요구하면, 일본정부는 돼먹지 않은 조선사람(不逞 鮮人)이라 해서 특별장부(Black List)에 기재하여 감시를 강화하고, 각 경찰서 와 일선 파출소까지 감시를 강화하라고 명단을 통보한다. 
  일본정부가 우민정치를 시행하니, 학교는 부족하고 배우고 싶어도 배울 기회 가 주어지지 않아 무식자가 많으며, 못 배운 것이 당연하니 허물이 되지 않는 다. 학교에 가서 신학문을 배우고 눈이 뜨인 사람은, 부락마다 사랑방을 빌려 한문을 배우는 서당을 차리고, 공터에 야학교를 세우고 강습소를 개설하여 한글을 가르치며 청소년의 무식을 없애려 노력한다.
 
 재작년(2004.10.15) 가을 모 생활정보지에 경기도 안산시민(홍석필: 81)이 어 린 시절,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여자 주인공 ‘채영신(蔡永信)’이 가르치는 야학당 제2회 졸업생이고, ‘채’ 선생 덕에 눈이 뜨여서 평생 그 은혜를 잊지 못해 보은의 길을 찾고 있다고 보도하며, 노인은 젊어서 정미소를 경영하여 돈을 많이 모아서 노후에는 여유 있는 생활을 한다며, ‘채영신’ 기념관을 지어달라고 안산시에 현금 1억 5천만 원을 기탁하고, 안산시는 ‘채영신’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한다.
 작년(2005.9.19) 가을에 국가보훈처에서 발행하는 나라사랑신문 제5면에, 일 제식민지 시대에 농촌계몽운동가이자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여자 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인물인 ‘최용신(1909~1935)’ 선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상록수공원에 지하 1층, 지상 1층으로 연면적 462평방미터 규모로, 내년도 상반기 시 예산과 독지가의 후원금 등 9억원을 들여 건립공사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보도한다.  
   1930년대 농촌에 심은 묘목이 비와 찬 서리를 맞으며 거목으로 자라, 70여 년이 지나서 꽃을 피운다. 옛날 일본 식민지 시대엔 우민정치를 하면서 한국 어린이의 입학을 허락하기 위해서 선발시험을 치르는데, 한 가지 예를 들면 기차 그림을 그려놓고 연기가 흘러가는 방향을 가리키며, “바람이 어느 쪽에서 부느냐?”라고 묻는가 하면, 기관차를 그려놓고 “기차가 어느 쪽으로 달리느냐?” 라고 묻는 선발시험으로, 기차를 보지 못한 어린이에겐 어려운 질문이오, 답변하기 힘든 문제다.

 초등학교를 지원하는 어린이는 많은데, 입학을 허락하는 숫자는 적으니 글을 배울 기회를 노치고 탈락하는 어린이가 많다.
 나도 초등학교 선발시험에 응시(1937.2)했으나 보기 좋게 낙방한다.  어 머닌 집안 형편이 나를 초등학교는 가르칠 수 있는 형편이라 선발시험에 또 낙방을 염려해서 선발시험 2일 전(1938. 2)에 인심이 후하다고 소문난 한국인 부교장(金東根)을 찾아가서 입학을 애원하여 배려를 약속 받는다.
  
  내가 들어가기 어려운 초등학교를 들어가니(1938. 4), 처음부터 일본말로 수업을 하며, 한국말을 일본어로 통역하느라 저학년 담임선생은 모두가 한국인 선생이다.
 체조시간에 상의를 벗고 대오를 지어 뛰는 데, 누군가가 열중에서 작은 목소리 로 “송키테이..., 송키테이”하고 속삭이니 모두가 “송키테이..., 송키테이” 하고 따라서 속삭인다. 말뜻은 몰라도 ‘송키테이’라는 구호는 구보와 관련된 단어로서 일본인 선생이 들으면 체벌을 받는다는 두려운 생각에, 모두가 ‘송키테이’ 하고 큰 소리로 외치지 못한다. 
  알고 보니 1936년 8월 9일, 세계 46개국이 참가한 제11회 베를린올림픽경기 대회에서 양정중학교에 다니던 ‘손기정’ 학생이 마라돈 경기에서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우승을 했는데, 동아일보에서 가슴에 단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이 춘천까지 전해져, ‘송키테이’라는 이름은 한국인 학생이 올림픽경기에서 우승을 해서, 일본 사람이 싫어하는 ‘손기정’이라는 이름의 일본 발음이다.
 수업 시간표엔 1주일에 1시간씩 조선어 과목이 들어있어 초등학교 어린이는 언문(諺文)이라고 해서 한글을 배우고 읽었는데, 일본정부는 1941년 봄에 학교 수업시간표에서 조선어 과목을 삭제한다.

  12살에 가장이 된 나는 어렵게 학업을 이어가고 있는 데, 졸업을 앞두고 등록금이 필요 없고 초등학교 선생 자리가 보장되는 사범학교 응시를 희망했으나 학교 당국으로부터 응시가 불허되고(일본 식민지시대엔 사범학교 응시는 학교장 의 추천이 필요했다), 등록금이 필요한 중학교와 농업학교는 진학할 형편이 못 되어 응시를 포기한다.
  한국에서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군수공장은 현지 징용공장이라 하여, 일본 본토의 공장과 동등하게 분류하고, 종업원도 현지에서 채용 했지만 신분은 정부에서 채용한 종업원으로 간주한다.
  현지 징용공장으로 지정된 공장은 인천의 히타치(日立)공장과 조선기계제작소 (대우중공업의 전신), 부평에 있는 조병창(造兵敞)뿐이다. 공장 당국에선 일본으로 끌려갈 젊은이가 한국에서 현지 징용공장 종업원으로 취직되어 가족을 부양 하며 후한 대접을 받고 있어, 공원(工員)으로 취직 하는 데에 여러 가지 조건을 내걸어 입사를 제한하니, 공원으로 취직하기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것과 같이 어렵다. 
  공장 직공으로 취직되면 정부에서 취직시킨 종업원으로 분류하고, 정부에선 기술 가진 종업원의 확보 수단으로, 기술자 양성소란 교육기관을 설립해서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 기술자를 배출한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입학시험이 끝나니, 인천에 있는 히타치공장 기술자양 성소 직원이 춘천초등학교까지 와서 학생을 모아놓고 하는 말이, “중학교 학생은 공부를 중단하고 근로봉사로 공장에 나가지만, 공장 기술자를 양성하는 양성 공(養成工)은, 나라에서 책을 무료로 나눠주며 기술을 가르치고, 공부를 시켜서 중학생보다 장래가 보장 된다”라고 선전한다. 
 
  양성공이 되면 쌀 배급량도 일본인과 같은 1일 4홉 8작 9재로, 한국의 일반인 이 받는 2홉 3작 8재보다 차별나게 배급하고, 급료도 공부하는 2년간은 학생 신분으로 5원 20전의 수당만 받지만, 양성소를 졸업하면 일반 공원의 반장으로 초임금도 60원으로 일반 공원의 50원보다 높은 액수를 지불하며, 식량의 배급량과 급료가 일반 공장 종업원보다 후하고, 자체 교육기관에서 기술자를 양성 배출하여 필요한 기술자를 확보한다고 생색을 낸다.
  사범학교 진학에 실패한 내 귀엔 현지 징용공장과 기술자 양성공이란 단어 가 솔깃하게 들리며, 등록금을 내고서도 공장에 나가 근로봉사를 할 바에야, 등록금 없이 수당을 받으며,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하고 공부를 하는 공장 기술자 양성공이 현실적으로 실리(實利)가 있다고 판단한다.
 기술자 양성공은 하루는 교실에서 이론을 배우고, 하루는 공장에 나가 이론을 실천하는 격일제 근무로, 중학생은 학업을 중단했지만 공장 기술자 양성공은 공부를 할 수 있어, 중학교로 진학하는 것보다는 공장 기술자 양성공이 좋다는 양성소 직원의 선전에 현혹 되어, 나는 공장 기술자 양성소로 떠나며 고향(春川)을 등진다. 
   고향을 떠나 인천에 온 전국의 어린 학생 100명을 공장 당국은 재학생 50명 과 합쳐서, 막사가 2동 30실 있는 기숙사에 수용하여 학칙(學則)을 적용받는 기숙사 생활을 시킨다.
  히타치공장은 주물(鑄物)공장과 내화(耐火)벽돌공장, 화학약품인 붕사(硼砂)를 생산하는 특수화학공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주물공장은 쇳물을 녹여 기관차의 부속품을 만들고, 내화 벽돌공장은 주물공장에서 용광로 벽을 쌓는 내화벽돌을 생산한다.
 특수화학공장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전엔 남미(南美)의 ‘칠레’에서 수입하던 자연산 붕사가 전쟁으로 수입길이 막히자, 일본 당국은 붕사의 화학 기호(na2b4 h710h20)가 들어있는 광석을 분리 융합해서 붕사를 생산한다.
  붕사는 확대경의 광도(光度)를 조절하는데 필수불가결의 화학약품이며, 잠수함의 잠망경을 만드는 데 소요되는 약품이라고 해서, 일본정부는 특수화학공장은 일반에겐 공개하지 않는 비밀공장으로 분류한다.

  물자는 귀해서 암시장(暗市場)에서 거래되는 상품은 쌀 1가마니에 100원, 지카타비(일본사람의 노동화) 1켤레에 100원, 좁쌀포대로 재단한 것과 같은 작업복이 100원을 호가하나, 가격만 형성돼 있을 뿐 실물은 없다. 
  그날은 내가 온돌의 난방(煖房)을 책임지는 ‘온돌당번’ 날이다. 기숙사 무연탄 저장고엔 무연탄이 없지만, 방을 따뜻이 하는 데 무연탄이 없다는 말은 이유가 못된다.
 평일엔 기숙사에서 공장으로 나가면, 책상 앞에서 화학방정식을 풀고, 프라스 코에 들어있는 붕사 액체에 시약(試藥)인 ‘만닛토’ 2,3방울을 떨어트려 붉은 색으로 변한 액체를 흔들며, 비중계(比重計)를 보고, 일정한 물에 녹아있는 붕사의 함량을 조사하는 데, 그날은 온돌의 난방을 책임지게 되었으니 하루 종일 온돌방을 어떻게 하면 따뜻이 하나 궁리만 하다가, 무연탄이 산더미같이 쌓인 공 장 저탄장(貯炭場)이 생각난다.

  일과시간에 저탄장에 가서 석탄 한 덩어리를 주어서 철조망 밑으로 갖다 놓 고, 일과가 끝나면 철조망 밖에서 석탄을 가져갈 심산(心算)으로, 일과가 끝날 무렵 하루 종일 궁리한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 
  일과가 끝나고 양성공은 기숙사로 가기 위해 대열을 짓고 손을 아래위로 흔들며 수위실 앞을 보무(步武)도 당당히 지나가는 데, 서무과 직원이 수위실에 있다가 지나가는 양성공 대열에서 나를 불러낸다.
 서무과 직원은 사무실 창문을 열고 내가 하는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 던 모양이다. 
  급히 수위실로 달려와 대오(隊伍)를 짓고 수위실 앞을 지나가는 양성공 대열에서 나를 불러내선, “왜 저탄장에서 석탄을 훔치느냐?”라고 하며,  멱살을 잡고 기숙사까지 끌고 가서 일본인 사감선생에게 인계한다.  
  일본인 사감선생(本宮武一)은 너를 인계 받자마자, “이 OO아, 조선 사람은 할 수 없구나”라고 하며 내 멱살을 잡고 마루바닥에 업어치기로 메다꽂곤 군화를 개조한 실내화로 마구 밟는다.
 한참을 밟고 나서도 분이 덜 풀리는 지 나를 잡아 일으키더니 주먹으로 사정없이 뺨을 때리는 데, 저녁에 식당에서 식사를 하자니 이가 아파 밥을 씹지 못하겠다.  
 
  일요일에 공장을 벗어나 시내로 나가려면, 집집마다 담 밑에 손으로 빚은 송 편 같은 무연탄을 말리고 있는 데, 태양열로 건조시킨 뒤에는 취사용 연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무연탄 가루가 날라 온통 세상이 뿌옇다.
  비 오는 날은 더욱 심해서, 여인들이 처음 버선을 신을 땐 오이씨 같이 희고 예쁘게 보이던 버선이, 하루가 지나면 버선이 검게 물들고 빳빳하던 버선목이 주저앉아, 서울이나 인천에 사는 도시인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으며,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는 농촌에 비해 도회지는 검은 빛이 대명사다.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Sat, 12 Aug 2006 20:56:5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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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6.25사변 56주년 기념일</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22</link>
	<description><![CDATA[오늘(2006.6.25)은 6.25사변 56주년 기념일이다. 공교롭게도 56년 전 그날도 일요일이었는데 오늘도 일요일이다.
  사호는 56년 전 6.25사변이 발발하지 않았던들 그의 인생길이 달라졌을 것이 기 때문에 자연 과거의 발자취를 돌아보게 된다.
  조국이 36년간의 일본 식민지 통치에서, 인적, 물적 착취로 경제는 파탄하고, 국민생활은 토탄에 빠진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마감(1945)되고 신생 국가를 건설할 때, 배운 사람은 잘 사는 나라를 만들고 부강한 조국을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며 서울로 올라가고, 조국 건설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동내 감나무 밑에 밀방석을 깔고 앉 아, 이승만과 김구, 김일성과 여운형 등 이름을 들먹이며 자본주의와 공상주의 를 거론했는데, 금년이 2006년이니 정확히 따져 61년이 지난 오늘, 조국은 보릿고개를 넘으며 가난을 견디고, 6.25 사변에 젊은이가 쓰러지고 가정이 파괴되며 동족상잔이라는 아픔을 겪어야 했고, 월남전 참전이라는 파도를 헤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1950년 6.25사변이 발발하던 당시엔 국민소득이 70$도 안 되던 가난한 나라가 55년이 지난 작년(2005)에 통계청이 발표한 국민소득은 16291$이다.  
  금년(2006)엔 사회에 훈풍이 불며 이웃나라로부터 IT선진국가, 경제대국이라는 칭호를 듣고, 사회는 희망으로 장래를 설계하고 목표를 향해서 뙬 때, 상호네 집 담장의 무궁화동산에도 무궁화 꽃이 활짝 피고, 상호도 건강을 회복하여 매일의 생활을 즐기고 있다,  
   무궁화는 어떤 꽃보다도 우리 생활 속에 들어와 친근하게 느껴지며 은근하고 겸손하다. 한국을 은자(隱者)의 나라라고 부른다면 무궁화는 요염한 색채나 향기도 없는 꽃이며, 점잖고 겸허한 군자의 풍모를 갖췄으므로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꽃에 손색이 없으며, 나라를 상징하는 국화(國花)로 삼기에도 충분하다.
 인류는 예로부터 생계(生計) 다음으로 꽃을 좋아하고, 무궁화는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가 자연발생적으로 좋아하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겨울철을 제외하곤 빨간색 흰색 등 단조로운 색채에 번식력이 강한 다년생 관목(灌木)이며, 집 주변에 심은 무궁화는 외부에서 오는 잡음을 차단하여 집을 지키며 소박하고 듬직하게 울타리 역할을 한다. 
 상호는 서울 사당동에 살면서 담장은 무궁화나무로 꾸몄는데. 매년 여름에 피 고 가을에 지는 무궁화 꽃이 특색이 없으니 무심코 넘어갔는데, 금년(2006)엔 꽃에 윤기가 흐르고, 붉고 흰 아름다운 모양에 둥근 자태를 뽐내니 지나가는 행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상호는 군에서 물러나 회사에 다니다 뇌출혈(1987.5,3)로 쓰러지며 투병을 계속할 때, 가루눈이 휘날리는 12월 초에 국립묘지로 가서 걸음마를 배우는데, 길 가 담장에 달려 있는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발견하고, 그도 투병을 하며 무궁화 꽃과 같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건강을 회복하고 사람 구실을 했으면 하고, 실현되기 어려운 실상(實像)을 바랐다.
 
 저녁(2006.2.4) TV뉴스 시간에 가수 “비”가 미국 공연무대에서 어깨를 흔들 고 허리를 돌리며 공연하는 모습을 방영하더니, 다음날 TV정오 뉴스 시간엔, 미 프로풋볼리그 챔피언전에서 우승하여, 트로피와 함께 최우수선수(MVP)의 칭호를 거머쥔, 한국인 여자와 미국인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하인스워드’ 선수가 한국의 국위를 빛냈다고 보도하며, 정부의 혼열아 정책을 거론한다.

  다음날 정오의 TV뉴스 시간(2006.2.5)엔,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이 UN사무총장에 입후보했다고 방영하고, 한국영화의 해외수출이 1억불을 넘었다고 보도 한다. 이어서 한국 청년자원봉사자가 월남과 라오스,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여 러 나라로 나가 앞서가는 한국의 IT산업 기술을 전파한다고 방영한다. 

  15일자 ㅇㅇ일보는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이강 석’의 역주하는 사진을 1면에 크게 싣고, 14년 만의 쾌거라고 보도 하더니, 2 월 24일 아침 TV뉴스 시간엔 이태리 ‘토리노’ 동계올림픽경기의 쇼트트랙 300 0m계주에서 한국 여자선수가 우승하여 1994년부터 연속 4연승을 하고, 시리아에 서 열린 2007아시아컵 B조 축구경기 예선 1차전에서, 홈팀인 시리아에 2대1로 승리했다고 보도한다.
 
  26일 저녁 9시 TV뉴스 시간엔 LPGA투어골프경기에서 ‘이미나’ 선수의 우승을 보도하고, 27일 아침 6시 TV뉴스 시가엔 ‘토리노’ 동계 올림픽경기 폐막식 모습을 방영하며, 남자의 ‘안현수’ 선수가 1000m, 1500m, 5000m계주에서 금메달을 따고, 여자선수는 ‘진선유’가 1000m, 1500m, 3000m계주에서 금메달을 딴 것을 비롯하여, 금메달 6, 은메달 3, 동메달 2로 종합성적 7위를 기록하고, 역대 올림픽 사상 가장 많은 메달을 땄다고 보도한다. 

  3월 들어서도 각종 경기에서 승리했다는 낭보는 끊이지 않고 있으며, 16일 오후 TV뉴스 시간에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에인젤스타디움에서 개최한 WBC(세계 야구월드컵 클래식)경기에서 한국이 한․미전에서 8회 말 ‘이동준’선수가 3루 홈런을 치는 통쾌한 모습을 방영하며 한국이 6대3으로 미국을 이기고 준결승에 올랐으며, ‘서재응’ 선수는 태극기를 마운드에 꽂으며 한국이 미국과 일본의 야구 그늘에서 벗어났음을 상징하는 ‘퍼포먼스’로 뭉클한 감동을 준다. 
  이어서 세계주니어스케이팅 종합경기에서 우리나라의 ‘김유림’이, 500m, 10 00m, 1500m에서 우승했다고 보도하며 남자 경기는 30년 만에 입상하고, 여자 경기는 사상 처음이라고 보도한다. 

  4얼 4일 ㅇㅇ일보 1면엔 미국 프로풋볼리그 챔피온전 최우수 선수 '하인스워 드'가 어머니 '김영희'와 함께, 4월 3일 오후 인천 국제공항 입국장에 들어오며 손을 흔들어 환영인파에 답하는 사진을 크게 싣더니, A25면엔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에폴리스에서 끝난 세계 쇼트트랙 스피트스케이팅 대회에서 한국이 종합우승을 하여, ‘안현수’와 ‘진선유’가 개인종합으로 4개 메이져대회를 석권했 다고 크게 보도한다.

  6월로 접어들며 12일자 ㅇㅇ일보 1면에 ‘박세리(29)’가 2년여에 걸친 깊은 슬럼프를 털어내고 ‘메이저 퀸’으로 부활했다고 트로피를 높이 들고 활짝 웃는 사진을 크게 실었다.      
  매일같이 일본에서, 중국과 홍콩, 대만에서,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호주와 토 고, 가나에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 스위스, 토이기와 이태리, 독일에서 대~ 한민국 하고 외치며 땅덩이가 흔들린다. 
  연일 신문과 TV에서 한류열풍이 국제무대로, 빙판으로, 운동장으로, 그리고 필드(Field)로, 태극기를 휘날리며 돌풍이 분다.

  상호도 질병에 이환(罹患)되고 15년을 투병하니 건강을 되찾게 되고, 기억이 살아나 상호를 보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으로 오인한다. 
  36년간 일본 식민지 치하에서 나라 없는 설움과 멸시를 받던 한민족(韓民族) 이 해방되고 60년이 지나니 세계 방방곡곡(坊坊曲曲)에서 한국을 알리는 함성이 들끓고, 태극기가 물결치며 무궁화 꽃이 활짝 피고, 상호도 무작정 상경하여 60년이 지나니 바라던 목표는 대부분 달성했다.

  돌아오는 해에는 보다 아름다운 무궁화 꽃을 감상하려면, 오늘을 사는 젊은이가 무궁화동산을 예쁘게 가꾸고 다듬으며, 거름을 주어 풍요로운 꽃밭을 만드는 일이며, 어제의 주역들은 뒤로 물러앉아 꽃밭 가꾸는 것을 지켜볼 일이다.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이 있는 이상, 대한민국은 영원히 번영할 것이다.
  
                                    상호의 생애 활동기록

상훈사항
 1. 문학상
     일시        기관명              내 용              기 관 장 
    1961. 7. 1. 육군본부        단편소설 당선         육군참모총장
    2002. 6. 1. 국가보훈처      참전수기 당선        국가보훈처장 

 2. 공로 표창장
1957.10. 4.  제21교육연대      공로표창장              연대장 구명회
1961. 1. 9.  육군제2훈련소     공로표창장           훈련소장 김동빈
1962. 2.15.  육군제2훈련소     공로표창장          훈련소장 최홍희
1964.10. 1.  제1군단           공로표창장                군단장 김상복
1966.12.26.  제2군사령부       공로표창장              사령관 박경원
1967.11.10.  육군정보학교      공로표창장             학교장 최영성
1968.10. 1.  제5관구사령부     공로표창장             사령관 한태원
1969. 6.30.  대한민국          인헌무공훈장             대통령 박정희
1970.10.10.  월남공화국        1등명예훈장         티우 월남 대통령 
1974.10. 1.  육군본부          공로표창장       육군참모총장 노재현
1975. 4. 9.  수도기계화사단    공로표창장             사단장 김종구   
1977. 2.28.  제60사단          공로표창장                사단장 조주태  
1980. 9. 1.  교통부            공로표창장                   장관   고  건
1983.12. 1.  교통부            공로표창장                장관    손수익
1993. 6. 1.  대한민국 정부  국가유공자증서         대통령   김영삼
1996. 1.26.  국가상훈대전      공적수록                     편찬위원회 
1997. 2.25.  대한민국 정부    참전용사증서          대통령   김영삼
2000. 6. 6.  청와대 비서실     위로서한               대통령   김대중
2004. 12.31. 국가보훈처  국가유공상이군인        보훈처장 박유철
                             
사회 활동

가. 저작 및 집필활동
    (1) 삼남일보 . 수필 邂逅외 다수(1960. 6. 24.)    
    (2) 삼남일보 . 소설 연재‘금팔찌(1960. 10. 3.)
    (3)전북대학신문. 소설 연재 裟婆외 다수(1960. 10.15.)  
    (4)육군신문.  수필 射擊場과 나. 어느 심벌. 鍊武野史(1961. 2. 18.)
    (5) 육군신문. 소설연재 對決(1961. 6. 25.)   
    (6) 교육월보. 중공군 홍위병 연구(1968. 8. 1.)
    (7) 교육월보. 모택동의 16자 전법(1968. 10. 1.)
    (8) 밀양박씨 해백공파 봉산 문중보(1991. 9. 15.)
    (9) 일본 국토여행기(1995. 9. 1.) 
나. 국책사업 수행활동
    (1)  세계 관광산업 시찰단 인솔(1977. 9. 1~1977. 9. 30.)
    (2) 전라북도 수자원 공무원 동남아 및 일본 정수시설 시찰단 인솔
         (1991. 7. 10~1991. 7. 20.)
    (3)한-일 친선 조정경기 학생선수권 니카타대회 선수단 인솔
           (중앙대부속여고 선수 및 강문고 선수 - 1991. 7.25 ~7.30.)        
    (4) 포항지구 상공인 일본 니카타껭 조에츠시 공업시설 시찰단 인솔  
        (1992, 10. 2~1992. 10. 10.)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Sun, 25 Jun 2006 20:53:16 +0900</dc:date>
	</item>
	<item>
	<title>전우는 떠난다</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21</link>
	<description><![CDATA[작년 여름(2005. 6. 16) 서울에 사는 동기생 심 중령(沈榮秀 中領:豫備役) 가족으로부터 초청장이 왔는데, 지난번 심 중령을 만났을 땐 집을 떠나 온 지 60년이 지난 이제야 고향에 갈 수 있는 길이 보인다며 미소 짓던 그가, 대전에 집(國立墓地)을 마련하고, 가족으로부터 집들이(安葬)를 한다고 초청장이 왔기에  대전으로 내려갔다.
그는 16세 되던 해에 평안북도 신의주 중학교 2학년(舊制)에 다니다, 반 공운동(신의주학생사건)에 가담(1945.11.23)했다는 죄로 공산당의 검거가 시작되자, 단신으로 38선을 넘어(1945.12) 서울로 와서 학교에 다니며 모진 고생을 하다, 국방경비대에 사병으로 자원입대(1947.5)하여 38선 바로 밑 (경기도 웅담읍 감악산)에 있는 부대에 배치되어, 복무를 하다가 인민군의 기습(1950.6.25)으로 전투를 하면서 경북 대구까지 밀렸다고 한다.
다부동(경북 칠곡군) 방어선을 지키며 인민군의 대구 침공을 저지하 다 미국의 맥아더 원수가 UN군을 거느리고 인천에 상륙(1950.9.15.)하여 서울을 수복(1950.9.28)하자 아군은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고, 그가 속했던 부대도 여러 전선을 거치며 평양을 거처 운산(평남)까지 다녀오는 길은 가시밭길이었으며, 두 번 다시 생각도 하기 싫은 길이었다고 머리를 썰레썰레 내두르며 27년간 전후방 각 부대를 돌며 조국을 지키다, 군복을 벗고 (1977.3)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나와 같이 일본 식민지 시대에 나라 없는 설음을 겪고, 조국이 해방 되자 살기 좋은 나라를 세우겠다고 여러 분야에서 뛰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저 세상으로 떠나가고 살아있는 사람도 몇 사람 안 남았다.
부지(敷地)가 넓고 현대화된 대저택(大邸宅)에서, 집들이잔치(安葬行事)를 하고 집을 나오며 넓은 들판을 바라보니, 나라의 부름 받은 젊은이가 전쟁터로 떠나며 심은 번영나무 묘목이 비와 서리를 맞으며 거목으로 자라서, 뒤따르는 후배들이 열매를 따 먹고 있다. 
주권을 찾은 지 60(還甲)여 년, 동족끼리 싸워야 했던 6.25사변이 발발 하고 50여 년이 지난 지금, 전쟁이 할퀴고 간 폐허 속에서 총총히 들어선 고층 건물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의 전개되는 상황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참고;다부동전투(1950.8.3~9.22) 
경북 칠곡군 다부동에 방어선을 설정하고, 1950년 8월 3일부터 9월 22일까지 국군 제1사단과 미 1기병산안이 대구로 침공 하려는 북한군 제3사단과 제13사단의 대구 침공을 저지한 전투로서, 미군 맥아더 원수의 인천 상륙으로(1950.9.15) 반격을 개시한 전투임.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Sun, 09 Apr 2006 09:54:00 +0900</dc:date>
	</item>
	<item>
	<title>60년 전 그 날</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20</link>
	<description><![CDATA[그 날(1945. 8. 15)은 더웠다. 
정오에 일본 천황의 중대 방송이 있어서 공장이 쉰다고 하여, 상호네 양성공도 공장 대신 교실에 모여 앉아 천황의 방송을 듣기로 한다. 
사감선생 (本宮武一)이 교탁 위에 라디오를 설치하고(일본 식민지 시대에는 라디오의 전원을 배터리 아닌 전기로 사용했음), 양성공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며 천황의 방송이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12시가 되자 사감선생이 라디오 스위치를 켜는데, “찌익 찍” 하고 잡음이 심한 가운데, 평소에 쓰지 않던 한문 술어라  “내...(朕の...)”하는 소리 외에 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거들먹거리며 라디오 방송을 듣던 사감선생은, “찌익 찍” 하는 잡음 속에서도 방송 내용을 알아들었는지, 앞에 있는 책상을 치며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했다고 통곡을 한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양성공이 웅성거리더니, 주물공장(鑄物工場) 목형부(木型部)의 가나무라(金村鳳烈)군이 벌떡 일어서서, 일본말이 아닌 한국말 로, “조선이 독립 된다아...”라고 외치더니, 자리를 박차고 미닫이로 된 교실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가는 데, 100여 명의 양성공이 한국말로 “만세에... 만세 에. ..” 하고 두 손을 높이 들고 껑충껑충 뛰면서 밖으로 나간다. 
상호는 한 달 치 월급 5원 20전과, 여비로 받은 5원 20전을 합한 10원 40 전을 받아들고 고향인 충남 예산으로 돌아온다.
일본이 미국, 영국 등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니, 한민족(韓民族)은 36년 간의 식민지통치에서 해방된다. 

국민은 식민지 민족의 공포에서 해방 되고, 남자 젊은이는 군대로 끌려가는 공포가 사라지며, 나이 든 젊은이는 일본 본토의 비행장 건설이나 군수공장, 철강공장과 탄광에 징용으로 끌려갈 염려가 없어진다.
처녀도 여자정신대(女子挺身隊)란 이름으로 종군 위안부로 전쟁터에 끌려가는 공포가 사라지고, 저녁이면 주권을 되찾은 기쁨에 마을마다 울리는 풍물 소리가 밤새 이어어진다. 
우리 국기가 따로 있다는데, 예고없이 찾아온 해방이라 국기가 있을 리 없고, 집집마다 일장기 둥그런 원형 안에 태극을 그려넣고, 둘레에는 8괘를 그린 태극기를 만들어 대문에 게양하고, 부자라고 소문난 송필헌(宋必憲)과 방면용(方冕容)은 집에서 술을 담아 동내 사람을 불러 대접하며,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은 기쁨을 함께 한다.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Sat, 24 Dec 2005 13:25:39 +0900</dc:date>
	</item>
	<item>
	<title>세대 차이</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19</link>
	<description><![CDATA[60년 전 우리 세대가 느꼈던 생각과 지금 세대의 감각은 하늘과 땅 차이다.
옛날엔 나라를 위해선 목숨을 바치고, 대를 위해선 소를 희생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지금은 내가 있어야 나라도 있고, 남을 위해서 내가 희생 하는 것은 바보가 하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에 부부 동반으로 점심을 하자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키 위해서 집사람과 같이 3호선 지하철 주엽역에서 열차를 탔는데, 노인석에 앉은 집사람이 옆 좌석에 앉은 할머니와 무었인가 재미있게 얘기를 주고 받는다.
 집으로 돌아와서 집사람에게, "열차에서 옆에 앉은 할머니와 무슨 얘기인가 재미있게 주고 받았는데, 무슨 얘기를 하였느냐?"라고 물으니 집사람이 대답하기를, "옆 사람은 1930년 생으로 손자가 군에 갔다가 휴가를 나와선, 자기 중대장을 가리켜 그 아저씨라고 하기에 중대장님이라고 불으라고 하니까, 손자가 말 하기를 요즘 군대에선 그렇게 부른다고 하면서 세상이 많이 변했다"라고 하더란다.
작년에 보병학교 동기생 모임이 용산역 앞 "용사의 집"에서 있었는데, 한 동기생이 월남전에 참전하여 '베트콩'의 집요하던 공격을 말 하고 있을 때, 한 동기생은 말 하기를 "나는 월남전에 참전 하라기에 옷을 벗었지, 죽을 줄 알면서 왜 전쟁터로 가느냐?"라고 말하며 의기 양양하고 그것을 듣는 동기생은 고개를 숙인다.
50년의 세월이 흐르니,"나라를 위해선 목숨을 바치고, 대를 위해선 소를 희생해야 한다고 배운 우리 인데, 지금은 내가 있어야 나라도 있고,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것은 바보라고 생각 한다.

60년 전에는 이순신이나 안중근, 김좌진이나 윤봉길은 애국자라고 흠모 했는데, 지금은 달리 해석한다.
세월따라 개념도 바뀐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살아온 과거를 후화 하지는 않는다.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Fri, 23 Dec 2005 04:45:32 +0900</dc:date>
	</item>
	<item>
	<title>진실과 허풍</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18</link>
	<description><![CDATA[나는 군대 생활을 하면서 1958년부터 1961년까지 M-1 소총 사격장 교관을 하면서 총소리에 노출되었고, 1969년부터 1970년까지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각종 총포 소리에 노출되었으며, 1971년부터 1973년까지 합참에서 야간 근무를 하면서 월남전을 수행하다 1972년 5월 난청(難聽)과 이명(耳鳴)이 동시에 왔는데, 등촌동 육군 통합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이명이나 난청은 불치병이라고 해서 치료를 단념하고 난청을 숨겨왔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군대 생활을 하면서 난청이 와서 국가보훈처에 난청을 전상으로 신청을 했더니, 입원기록이 없다고 요건 비해당자로 통보가 와서, 그 결정에 불복하고 법제처에다 행정심판을 요구했더니,육군병원에 기록이 없다고 기각으로 판결이 나서, 의정부 보훈지청 급수 조정 담당 직원에게 문의한 바, 그 직원 왈 "관공서에선 모든 것이 증거주의라서 심증으론 유리한 판결을 못 받는다"고 해서, 행정법원까지 가서 재판을 받으려던 결심을 다시 한 번 생각하니, 옛날엔 난청이나 이명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입원이나 치료를 안했지만, 수 10년의 세월이 흐르니, 지금은 난청이나 이명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공개하는 분위기라, 군대 생활에서 얻은 병이지만 내가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단념을 했지만 억울한 마음은 가시지 않는다.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Fri, 08 Apr 2005 00:20:04 +0900</dc:date>
	</item>
	<item>
	<title>상이군인</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15</link>
	<description><![CDATA[월요일(2004. 8. 23) 오전이다. 
의사의 진단과 약을 타러 서울 둔촌동 보훈병원을 찾았는 데, 35년 전 월남에서 같이 근무하던 공군의 정인선 소령을 만났다. 
“어디가 아파서 병원에 왔느냐”라는 상호 물음에 정 소령은 “나는 19 80년에 대령으로 예편하고, 10년 만인 1990년에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당뇨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 데, 당뇨병이 고엽제 후유증이란 것을   알고, 용산에 있는 국가보훈처 서울지청에 신고(2000. 5)하여 지금은   국비환자로 등록되어, 진료비와 약값은 무료요, 매월 생계비의 일부를 보조받고 있으며, 오늘도 의사의 진료와 약을 타러 보훈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국비환자라면 상이군인인 데, 상호는 휴전 직후의 사회상을 회상한다. 상호가 육군중위 때(1957. 11)의 일이다. 연례장교정예신체검사에서 폐가 나쁘다는 판정을 받고, 한겨울에 제대를 위해서 부산 동래에 있는 육군 제31병원으로 후송이 됐다. 제31병원은 일명 정양원이라고도 부르며, 전상(戰傷)으로 집에 돌려보내지 못하는 중증 상이군인을 국가에서 수용 관리하는 곳이며, 한편으론 군인으로 복무하기엔 부적합한 장교가 제대를 앞두고 대기하는 곳이다.

 휴전 직후에는 전쟁을 하느라 국고는 바닥나고,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하고 손발이 잘린 부상병은 국가에서 학교 교실에 수용하여 병원 역할을 하며 하루 3끼 식사만 제공하고, 방치된 중증 상이군인은 가족의 부양을 책임지고 살길을 찾아 병원을 뛰쳐나와 거리를 방황했다.

 제31병원은 5동의 콘크리트 건물에서 1동은 장교 내무반이오, 2동은 하사관 내무반이며 2동은 병원이다. 저녁을 먹고 난로 가에 둘러 앉아 김(金應洙) 중위가  “백마고지 방어 시(1952. 11)에 소대장으로 중공군과 싸우던 경험을 얘기하는 데, 하사관 내무반에서 민(閔丙浩) 중 사가 놀러왔다.
“동래극장에서 상연하는 ‘셰인’이라는 영화가 재미 있다기에 보러 가는 데, 장교 내무반에서 같이 갈 사람은 없습니까” 하고 동행을 권유한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김(金相基) 중위가 간다고 하기에 상호도 따라나선다. 
민 중사가 내무반으로 가더니 목발 2쌍을 가져와서,  “장교 님, 이 목 발을 가지고 가다가 극장 입구에서는 목발에 기대어 발을 끌다가 곧게 뻗으며 극장으로 들어갑니다” 하고 상이군인이 극장에 무료로 입장하 는 요령을 알려준다.

 제31병원에 수용된 장교는 제대 명령을 기다리는 장교요, 사병은 전투를 하다가 부상을 당한 중증 상이군인으로 집으로 가지 못할 형편이라 병원에 집단 수용했는 데, 신분은 모두가 현역이라 손이 잘려 의수(갈고리)를 한 군인은 갈고리부대원이라 부르고, 발이 잘려 의족(義足) 을 한 군인은 목발부대원이라 부르며, 손발이 모두 잘린 군인은 달마부대원이라 부른다.
10여 명의 대원이 집합하여 극장 입구까지 가서는, 갈고리부대원이 앞에 서고, 목발부대원이 뒤따르며, 맨 뒤에는 달마부대원이 갈고리부 대원의 등에 업혀 줄지어 안으로 들어가는 데, 입장권을 요구하는 검표 직원에게 갈고리부대원은 뒤따르는 부대원이 요금을 낸다고 갈고리 의 수를 번쩍 들면, 목발부대원은 묵묵히 뒤따르고, 맨 뒤에는 갈고리부대 원이 달마부대원을 업고 당당하게 입장하고, 입장권을 요구하던 검표 직원은 물끄러미 줄 지어 입장하는 관람부대원의 뒷모습만 바라본다.   

돈 있는 부대원은 아침에 상가를 찾아가서, 상인들이 요구하는 금액 을 나눠주고, 늦은 저녁에 찾아가선 아침에 나눠준 원금에 추가해서 1할의 이자를 받는다. 기차를 타고 자리에 앉으면 갈고리부대원이 갈고 리에 신문을 끼어 승객 무릎 위에 올려놓고, 승객은 말없이 신문 값으 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는 데, 이 돈은 사회가 정한 상이군인이 파 는 신문 한 장의 공정가격이다.
그래도 상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이나, 신문판매는 점잖은 행 위요, 절망에 빠진 상이군인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길을 찾는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세금을 걷으러 간다고 갈고리부대원이 달마 부대원을 업고, 부산을 출발해서 서울의 대기업체를 찾아가 사장실 책 상 위에 달마부대원을 내려놓으면, 사장은 말없이 일정액의 지폐다발을 내놓는데, 이것을 가리켜 정부에서 징수하지 못하는 세금을 상이군인이 걷는다고 해서 “애국세”라고 부른다.

50년이 지난 지금은 나라 살림이 넉넉해서 정부에서 용사촌을 지어 상이군인을 수용하고, 상처 부위에 따라 급수를 매겨 국가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질병엔 약을 주며 생계를 지원하여 거부감이 없지만, 휴전 직후에는 정부에서 대책이 없으니 상이군인이 거리를 방황하고, 기업체 집행 예산에는 예비비라고 해서 상이군인에게 지불할 경비가 같이 편성되어서, 상이군인 하면 국가에 기여한 공로보다는 사회에서 외면하는 압력단체원이요, 행패 부리는 공포의 대상으로 사회에 기생하는 필요악의 존재다. 

전쟁이 끝난 지 4년 뒤의 일이오, 지금부터 47년 전의 일이다.

 정 대령의 말을 듣고 원무 3과 고엽제 담당직원을 찾아가서 상의를 하니, 담당직원은 주치의의 진단서를 가지고 관할 보훈지청에 가서, 고엽제후유증 담당직원을 만나 상의하라고 한다.                              
상호가 35년 전 월남에 파병되어 보직을 받기 전에 야전에 나가 진중 근무를 하며, 미군 폭격기의 폭격과 포탄이 작열하는 소리, 미군의 ‘코 부라’ 헬기에서 뿌리는 고엽제 흰 가루가 높은 산에서 안개가 가라앉듯 밀림 위로 가라앉는 것을 본 기억이 회상된다. 

의사의 진단서를 가지고 의정부 보훈지청 고엽제후유증 담당직원을 만나 상의를 하니, “오늘이  2004년 8월 23일이니 2개월 후인 10월에 본인과 보훈병원으로 통보가 가서 신체검사를 거쳐 고엽제후유증 환자로 판정이 나면, 국비환자로 등록하여 병은 국가에서 무료로 치료하고, 발병 정도에 따라 매월 생활비의 일부를 보조 하겠다고 신체검사 결과를 기다리자고 한다. 

우리 사회는 옛부터 년령이 60세가 되는 해를, 갑자, 을축, 병인, 정묘 하고 육갑으로 따져 자기가 태어난 태세(太歲)가 돌아오면 환갑이라 하여, 그 자손들은 자기 어른의 장수를 기뻐하며 친지를 불러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으나, 현대는 의학이 발달하고 의식주가 안정되어 60대는 청년이오, 70대는 장년이고, 80대가 지나야 노인이라고 한다.                                        
건강을 염려해서 아침 일찍 등산을 하고 아파트로 돌아오는 데, 현관 우편함에 편지가 들어있다. 지난 10월 19일(2004) 서울 둔촌동 보훈병원에서 실시했던 신체검사 결과의 통지서다.
 
편지 봉투 안에는 상호가 ‘국가유공자 지원 등에 관한 법률’ 제4조 제4항을 적용받는 “전상군인”에 해당되고, 상이(傷痍)등급  6급 1호로 분류되어 전상(戰傷)에 대한 보답으로 국가에서 병을 치료하고, 매월 생활비의 일부를 보조 하겠다고 12월 31일까지 신분증과 도장, 사진 2매를 가지고 의정부 보훈지청 관리과로 출두하라 는 통지서다. 

 아침 일찍(2004. 12. 31) 상호가 일산에서 출발하여 의정부 보훈지청에 당도하니 12시 30분이다. 점심시간이라 직원이 없을 줄 알았는 데, 2,3명 남아있는 직원 중에 고엽제후유증 담당 직원도 남아 있다. 고엽제후유증 담당 직원은 상호를 보고 반갑게 마지하며 신분증과 사진, 도장을 요구 하기에 3가지를 주었더니, 그 자리에서 국가유공자 보훈번호 21212034로 등록하고 신분증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국가유공상이자가 누릴 수 있는 보훈혜택을 설명한다. 상호가 월남에서 귀국한 지 34년 만이오, 고엽제후유증으로 발병한 지 17년 만의 일이다.
상호는 74년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군대생활 27년, 공직생활 10년에 출납관(出納官), 예산장교(豫算將校), 검수관(檢受官), 통제관(統制官), 관광외교관(觀光外交官)이란 부직함(副職銜)을 가지고, 구치소와 직결되는 위험한 오솔길을 아슬아슬하게 걷다가, 기억상실증으로 17년의 세월은 잊어버리고, 금년 1월에 의정부 보훈지청에 기지고 있는 질병을 신고하니, 국가보훈처에선 서울 보훈병원의 신체검사를 거쳐 국가유공상이군인으로 판정하고, 신고한 시점에서 살아가는 데 국가에서 지원을 하겠다고 한다.

전쟁 직후에는 상이군인 하면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사회가 50년이 지나니, 상이군인을 국비 환자라 부르며 긍정적으로 평가 한다. 

꼭 60년 전의 일이다.
상호가 어린 장돌림이란 호칭을 들으며 고향의 여러 장을 떠돌 때, 나도 국가를 위해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했는 데, 애국하는 방법 중 하나가 상호 몫으로 돌아온다. 

연극 무대에서 주연 배우는 짜여진 각본대로 열심히 공연해야 하는 데, 각본대로 공연하지 않으면 연극이 끝난 시점에서 데엥하고 징을 치며 막이 네리고, 대기실로 들어가면 기다리고 있던 연출자로부터 연극을 불성실하게 했다고 심한 꾸중을 듣는다.
상호도 짜여진 각본대로 인생극장에서 열심히 공연하니 데엥하고 징이 울리고, 무대에서 네려와 대기실로 들어가니 기다리고 있던 연출자는 연극이 성공적으로 공연되었으니 앞으로의 생활은 극단 측에서 책임진다고 하는 데, 주연 배우가 공연할 무대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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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Fri, 17 Dec 2004 21:41:18 +0900</dc:date>
	</item>
	<item>
	<title>강남구와 일산구</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14</link>
	<description><![CDATA[  작년(2003) 8월 13일부터 연재하던 글은 내 이야기로 1년 넘게 끌고 왔으나, 이제 줄거리를 하나로 묶어 책으로 편집해서 출판하기로 하고, 오늘부터는 수시로 생각나는 과제를 수필로 써서 연재하기로 한다. 

   강남구 하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특별시에서도 대기업체의 본사와 각종 사무실이 입주하고, 건물이 밀집하여 각종 편의시설과 시민의 생활환경이 쾌적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사람이 움직이는 대지(大地)는 좁고 공기는 탁해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에게는 노후생활을 시골로 내려가서 자연과 더불어 지내려 한다.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에선 경기도를 꼽지만, 그 중에서도 분당과 일산은 녹지와 생활공간이 넓고 공원이 많으며 공기가 맑아, 노후를 보내는 데에는 최적지로 꼽는다.       

  상호도 젊어서 시작한 공직 생활에서, 늙으면 공기 좋고 생활환경이 쾌적한 전원도시에서 살겠다고 꿈꾸며. 노후를 대비해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상호 세대는 평균 수명이 60을 넘지 못한데다, 6.25사변이 끼어서 제 명(命)을 살면서 환갑(還甲)을 넘겼다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1950년 6.25사변이 발발하자, 학교에 다니던 상호로선 20세의 나이라 군대에 갈 수 있는 만만한 시기다. 타의에 의해 시작한 군대생활 이 6.25사변을 치르고도 살아남아 월남까지 다녀왔으니, 본인 스스로 생각해도 꽤나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타의에 의해 시작한 공직생활을 자의에 의해서 60세까지만 하고, 환갑이 지나면 시골로 내려가서 노후를 즐기리라 마음 먹었는데, 환갑을 3년 압두고 부르지도 않은 뇌출혈이 먼저 상호를 찾아온다. 

 서울 시내 종합병원에서 뇌수술을 받고 엎드려 투병을 하며 17년이 지나니, 강남구에서 살던 상호가 타의에 의해서 일산구 전원도시에서 살고 있다.

  오른쪽 몸뚱이는 반신불수(半身不隨)요, 왼쪽 눈은 실명(失明)이고, 오른쪽 눈은 시력(視力) 저하에 귀(耳)는 난청 (難聽)으로, 온 몸이 만신창이 (滿身瘡痍)가 되어 쓸모없는 인간의 폐물(廢物)이 되었다.     

  옛날 봉급생활을 할 때는 서울에 살면서 대한민국 중산층 시민으로,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몸을 의지하고, 자의로 운명을 개척한다고 자처하던 상호가, 병이 들며 직장을 잃고 일산으로 이사 오니, 태풍이 불며 배가 뒤집히고 바다 위에서 살겠다고 허위적거리는 말단서민(末端庶民)의 신세가 되었다.   

  2004년 1월이다.
  생활 보조금을 받은 상호가, “정부에선 오래 전부터 전상자(戰傷者)의 병을 치료하고 생활비를 보조하며, 1993년 3월부터는 고엽제 후유증 환자의 생활을 지원하고 있는데, 나도 진작 이 사실을 알았으면 생활환경이 조금은 낳아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에, 상호 아내는 “국가의 지원사실도 모르고 국립묘지에 누워있는 사람도 있는 데, 당신은 살아서 움직이니 누워있는 사람을 생각해서 모든 것을 잊으시오”라고 한다.
                
  평지인 시골 장터에서 산꼭대기에 위치한 청와대까지 숨을 허덕이며 올라갔지만, 상호의 처지를 시기(猜忌)한 ‘운명’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산꼭대기에서 평지로 끌려 내려왔다. 

  해방 직후 등록금이 없어 학교는 못 가고, 등(山) 넘어 서당에 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명심보감에 있는 문장에서, “시래에 풍송 등왕각(時來 風送滕王閣)”이오, “운퇴에 뇌굉 천복비(運退雷轟薦福碑)”란 글을 읽던 생각을 하며, 상호 신세와 명심보감의 글귀를 비교해 본다.

 글 뜻 : 사람이 인생을 사노라면 운이 좋을 때도 있고 좋지 않을 때도 있다. 운이 좋을 때는 의외로 일이 잘 풀리지만, 운이 나쁠 때는 생각지 않은 일까지 일어나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으로 계몽편-순명편(啓蒙篇-順命篇)에 있는 말이다.

 해설 : 중국의 당나라 때 도독부(都督府)의 장이던 “염백서”가   양자강 유역에 있는 남창 (南昌)에 등왕각(滕王閣)이란 정자를 짓고, 준공식에서 자기 사위가 비각(碑閣)의 서문 (序文)을 쓰도록 하여, 세상 사람에게 은근히 사위의 문장 자랑을 할 심산이었다.  

  그 시기에 남창에서 7백리나 떨어진 동정호(洞庭湖) 부근에 왕발(王勃)이란 시인이 살고 있었다. 등왕각의 준공일이 9월 9일인 데, 9월 7일 밤 꿈속에서 백발노인이 나타나, “등왕각”의 준공식에 가서 현판(懸板)의 서문(序文)을 쓰라고 하면서 사라졌는데, 꿈에서 깨어난 왕발이 아무리 생각해도 교통수단이 열악하던 당시로선 7백리 길을 하루에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꿈속의 대화가 너무도 생생해서 “동정호”에 배를 띄우니, 순풍이 강하게 불며 하루 밤 사이에 7백리나 떨어진 “남창”까지 배를 밀어주어, 9월 9일 아침에 열리는 준공식 시간에 맞추어 왕발이 “등왕각”의 현판 서문을 쓰니, 준공식에서 사위로 하여금 서문을 쓰게 하여 문장 자랑을 하려던 “염백서”의 심산을 무위(無爲)로 만들고, “왕발”의 등왕각 현판시(懸板詩)는 오래도록 후세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는 중국의 고사(古事)다.

  이와는 반대로 중국의 송나라 때 한 가난한 서생이 있었는데, 이웃에 사는 부호(富豪)가 당대의 명필 구양순(歐陽詢)이, 요주(饒州)의 천복산(薦福山)에 세운 천복사(薦福寺)의 비문을 탁본 해다 주면, 많은 사례금을 준다기에 희망을 안고 “천복산”으로 떠났는데, 서생이 “천복산”에 도착하자마자 벼락이 천복사의 비석에 떨어져 글귀를 부쉈다는 중국의 옛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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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Wed, 15 Sep 2004 03:21:32 +0900</dc:date>
	</item>
	<item>
	<title>족보(族譜)와 가승보(家乘譜)</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13</link>
	<description><![CDATA[1. 족 보 
  족보는 시조(始祖)로부터 역대 조상의 얼이 담긴 귀중한 보감 (寶鑑)이므로 가보(家寶)처럼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
  옛 어른들은 족보를 대할 때는 상(床) 위에 모신(놓은) 다음 정한수를 떠놓고 절을 2번 하고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살아계신 조상을 모시듯 대하며 자기가 궁금했던 사항을 확인했다.  
  해방 후 밀어닥친 양풍(洋風)에 휘말려 지금은 자녀들이 나가 사는 핵가족(核家族) 시대가 되면서, 젊은이는 족보(族譜) 모시 (두)는 것을 봉건사회(封建社會)의 유물로 생각하고, 족보는 가정 사를 밝히는 참고서 정도로 만 여길 뿐 어른들의 경조사상(敬祖 思想)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사대사전(韓國史大事典)에선 족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족보는 한 종족의 계보(系譜)를 밝히는 문서로서, 부계(父系)  를 중심으로 혈연관계(血緣關係)를 도표식으로 나타낸 책이며, 조 상을 존경하고 종족의 단결을 도모하며, 후손으로 하여금 친밀도 의 원근(遠近)을 가리지 않고 화목(和睦)을 이루는 데 목적을 둔 다. 성족파벌(姓族派閥)과 문벌가승(門閥家乘)을 밝히며, 존비(尊 卑), 항열(行列), 적서(嫡庶)의 구별을 한다.”

  족보는 중국에서 비롯되었으며, 후한(後漢-540) 이후 중앙과 지방에서 대대로 고관을 배출하는 우족(右族)과 관족(冠族)이 성 립 됨에 따라 문벌가풍을 존중하는 사상이 높아졌다. 


   6조(吳, 東, 宋, 齊, 梁, 晉)에 이르러선 조상의 관력(官歷)과 계보(系譜), 임관(任官), 관작(官爵), 승진(昇進), 혼인(婚姻)과 교제(交際) 관계까지 기록하면서 족보의 작성과 보학(譜學)이 발 달하였으며, 이 사상이 한국으로 도입되면서, 오늘날은 대부분의 가정에서도 자기 뿌리를 밝히는 족보가 있으며, 산소(墓地)도 시 조로부터 역대 조상의 산소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족보는 한국 사람과 중국사람 만이 모시고 있으며, 외국 사람은 일부 국가만이 家乘譜 형태로 모시고 있다. 

  2. 한국의 족보
  우리나라에서 오래 된 족보는 안동권(安東權)씨의 족보다. 1476(成宗7)년의 간행으로 성화보(成化譜)이며, 문화류씨(文化 柳氏)의 가정보(嘉正譜)보다 80여 년 앞서고 있다. 족보는 조선 계급 사회의 산물로, 권씨(權氏), 류씨(柳氏) 두 족보의 영향을 받아 권문거족(權門巨族)이 앞 다투어 족보의 간행에 열을 올렸 다.
  족보의 간행은 이조 초기라고 되어 있으나 세계(世系)나 항열 (行列) 형식으론 고려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3. 항렬과 이름   
    우리나라 이름은 대체로 돌림자를 가지고 있다. 형제들은 형 제들대로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그들대로 이름자 속에 돌림자가 있으며, 같은 혈족에 속하면 조상이 정해 놓은 돌림자를 씀으로서 같은 혈족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항렬은 단순히 이름의 돌림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몇 대 손이 되는가를 표시하는 구실을 한다.

 집안에 따라서는 항 렬은 나이에 우선하며, 항렬이 높은 사람에 대해서는 윗사람 대접 을 하고, 항렬이 낮은 사람에 대해서는 말 을 놓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도 동족 항렬이 높은 사람이 장이며, 낮은 사람은 유(幼)가 되는 것이다.  조상이 정해 놓은 항렬자는 원칙적으로 변개(變改) 할 수 없으나, 옛날 전제정치(專制政治) 아래서는 잘못하면 역적(逆賊)으로 몰려, 친가(親家)나 처가(妻家)  외가(外家)의 3집안이 망했기 때문에, 역적으로 몰린 사람은 이름 을 족보에서 빼거나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다.
  돌아가신 어른의 이름을 높이 부르는 뜻에서 휘자(諱字)라고 하 며, 살아계신 어른의 이름 밑에는 씨자(氏字)를 넣어서 부른다.      
  4. 족보 보는 법 
    가. 족보를 보려면 “나 자신”이 어느 파에 속해 있는지를 알 아야 한다.
    나. 파를 알지 못할 때는 조상이 어느 지역에 살았고, 어떤 파가 살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다. 파를 모를 때는 씨족(氏族) 전체가 수록된 대동보를 확인한다.
    라. 시조로부터 몇 세인지를 알아야 한다. 족보는 가로로 단을 그어 같은 세대에 속하는 자손은 같은 단에 배열하였으므로, 자기 세대의 단만 보면 된다. 세수(世數)를 모르면 항렬자(行列字 )를 혜아려야 한다. 
    마. 파의 명칭은 파조(派祖)의 관작명(官爵名), 시호(諡號), 아호(雅號)를 따서 붙인 것이다.
    바. 파를 찾으려면 계도보(系圖譜)를 보아야 한다. 계보도는 갈라져 나간 자손을 알 수 있도록 그려놓고, 무슨 파는 몇 면 몇 권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5. 家乘譜
  가승보는 간단하게 시조로부터 자기 대에 이르는 가족의 줄기 만을 기록하고 있으며, 종가(宗家)로부터 분가한 자손이 임시로 자기 뿌리를 밝히는 계도(系圖)를 모시고(가지고) 있다.
  가. 한국의 가승보
    한국 사람은 지손이 미쳐 족보를 모시지 못하는 경우에 자기 뿌리를 밝히는 가승보를 모시(갖)고 있다. 가승보는 자기 뿌리를 밝히는 임시 문서이며, 족보로 바꿔 모신다.

   나. 일본의 가계보(家系譜)
     일본 사람은 현 천황가(天皇家)가 125대 2660여 년을 이어 오는 가계보를 모시고 있으며, 호소카와(細川) 전 내각총리대신 집에도 가계보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친밀감을 가지고 있 는 일본의 14대 도공(陶工) 심수관(沈壽官)씨도 임진왜란 때 일본 으로 끌려온 조상의 가계보를 모시고 있다.
  일본에서는 천황가나 내각총리대신, 내각대신과 심수관씨 정도 의 명문 집안이라야 가계보를 모시고(갖고) 있다.(일본사람은 가 승보라고 하지 않고 가계보라고 한다.)
    
                       참고: 교육도서 간행 한국사 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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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Tue, 10 Aug 2004 08:23:53 +0900</dc:date>
	</item>
	<item>
	<title>성씨(姓氏)의 유래(由來)</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12</link>
	<description><![CDATA[가. 성씨의 유래
   성씨의 사용은 중국의 주(周)나라(265 BC) 시대부터라고 한다.
우리 나라 성은 중국 성을 모방한 것으로 3국 시대까지는 한자(漢字)로 된 성씨는 없었으나, 신라 말엽에 중국과 통교(通交)하면서 귀족간에 통용되다가 고려 문종(1047-1083) 때에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과거를 못 보게 하고, 모든 백성은 성(姓)을 사용하도록 정부의 명령이 공포되어 성을 사용 하였으며, 고려 중엽 이후 일반에 널리 보급되었다.

  1. 중국 사람의 성씨
    성씨는 모계사회에서 통용되던 가족제도의 호칭이다.   
성은 어머니가 태어난 고향이나 집 근처의 하천을 잊지 않기 위한 부호(地名)이며, 씨는 가족을 식별하기 위해서 개인에게 부쳐진 부호(이름)다.
삶이 복잡해짐에 따라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오면서 성은 가족 집단을 대표하는 부호가 되고, 씨는 개인을 나타내는 부호가 되었다.
현대에 와선 나라마다 성씨의 사용과 목적이 다르다.같은 민족이면서 중국 대륙에서는 "부부는 각자 자기의 성명을 가질 권리를 가진다"라고 법으로 정하는가 하면, 대만에서는 자기 본성 외에 남편의 성을 덧얹어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라고 규정하여 "남편 성+자기 성+이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2. 한국 사람의 성씨 
우리 나라는 처음부터 성과 씨를 구분하지 않았고, 성씨는 성을 의미하며, 조상이 살던 곳이나 지명을 본관이나 관향이라 부르고, 인연을 따라 성을 창설했다.
신라 시조 혁거세는 박(瓢)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을 박(朴)씨로 하고,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해서 성을 고(高)씨로 하였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30세 후손 언침(彦枕)은 밀양에서 살았다 해서 본관을 밀양으로 하고, 신라 사람 알지(閼智-脫解王-9)는 계림(鷄林)에 있던 금궤(金櫃)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탈해왕이 성을 김(金)으로 사성(賜姓-성이 없는 백성에게 임금이 성을 창설해 주는 것)하고, 백제왕은 부여에 도읍을 정했다고 해서 성을 부여(扶餘)로 하였다.
우리 사회는 씨족 관념과 성명의식이 뿌리 깊이 남아있다. 호적에 부계혈통의 본관(本貫)을 적고, 문중에서는 다투어 족보를 편찬한다.
우리는 조상이 물려준 성씨를 귀히 여기고 현명하게 사용하며, 성씨를 더럽히지 않고 가문의 명예를 존중하며, 집안에서 명문대가(名文大家)가 나오면 이 사실을 온 천하에 자랑한다.
우리 나라 성씨의 수는 고대문헌인 조선씨족통보(增補文獻統譜)에 수록된 것이 497종이며, 이의헌(李宜顯1669-1745)이 저술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 298종, 일본 정치시대에 실시한 국세조사에는 250종이고, 1985년에 실시한 국세조사에는 275종이다.

2004년 현재는 아직 발표가 없어서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으나 외국인의 귀화와 성씨의 창설 등으로 그 숫자는 늘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3. 일본 사람의 성씨
일본 사람의 성씨는 복잡다단하며 숫자로 봐서 세계 제일이다.
단자로 된 성씨도 있고 복자로 된 성씨도 있으며 3자로 된 성씨도 있다.
성씨라도 가문에 따라 표기와 표음으로 부르기도 하고, 가문(家門)마다 가문(家紋)이라는 것이 있고, 신문(神紋), 문장(紋章) 기문(旗紋)이 있다.
성을 창설 할 때 밭 가운데서 자기가 살았으면 다나카(田中), 산 속에서 살았으면 야마마나카(山中)라고 창설했다.
가문(家紋)은 집안을 상징하는 표시로 일본 전통의 옷 상의인 '하오리' 등 뒤에 집안을 상징하는 무늬를 넣는 것이며, 신문은 신사에 모시고 있는 신주의 상징물이고, 문장은 총체적인 이름이오, 기문은 부족의 장(長)이 적과 전투를 할 때 자기 진영을 알리기 위해서 기다란 깃발에 문장을 넣은 것을 말한다.
 
  4. 미국 사람의 성씨 
미국은 건국한 기간이 짧으며 여러 나라 사람이 모여서 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각자 자기 나라 전통과 습관을 고집하기 때문에 성의 창설도 복잡하다.
달 표면에 인류 역사상 최초로 상륙한 "암스트롱(ArmStrong)은 자기 조상이 팔씨름을 잘 했고, 스미스(Smith)는 조상이 대장쟁이이며, 휫셔(Fisher)는 어부요, 파워(power)는 조상이 힘이 센 사람이었다.

  5. 기타 외국 사람의 성씨
외국에선 시집가면 남편의 성을 따른다.
구라파의 이태리, 오스트리아, 독일, 스위스, 브라질도 아내는 남편 성을 따르며, 영국이나 미국도 같은 현상이다.
이것은 법률이 규제하는 것은 아니며, 아내는 결혼 전의 자기 이름을 그대로 가질 수도 있고, 자유로이 바꿀 수도 있다.
나라의 역사가 오래 될수록 성씨에 따른 자부심과 집념이 강하며, 역사가 짧을수록 성에 관한 관념은 희박하다.
어떤 나라에서는 대통령이나 국민이 모두 이름만 있는가 하면, 취미나 자기 필요에 따라 이름 위에 이것 저것 뜻 없는 단어를 부치는 나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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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Sat, 31 Jul 2004 01:21:53 +0900</dc:date>
	</item>
	<item>
	<title>황혼의 관광 (문정은)</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11</link>
	<description><![CDATA[아침 8시.
경남 아파트 10단지 노인정 회원 26명과 에이스 노인정 회원 18명 등 도합 44명이 탄 광광버스가 춘계 관광을 위해서 충남 서산의 안면도로 향한다. 해 뜨기 전이라 안개가 짙어 앞이 안보이더니 차츰 안개가 겉이며 쾌적한 자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5,6명의 부녀회 회원들이 자청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관광 나들이를 보살펴 드리기로 하고 같이 동승한다. 차 속에서 떡과 고기, 음료수를 나르고, 운전기사의 일정 안내에 뒤이어 은은한 고전음악이 차 속 가득히 흘러 퍼진다.   

  아파트 관리소 앞을 떠난 관광버스가 서산을 향해 40분쯤 달리는 데, 할머니 2명이 차멀미 때문에 비상이 걸린다. 다행히 내가 가지 고 간 멀미약을 주니 차멀미가 가라앉고, 차 속 분위기가 명랑을 회복하니 내 준비성이 돋보인다.   

  아파트를 떠난 지 1시간이나 되었을까, 서울 도심을 달리던 관광버스는 우측으로 돌아 고속도로로 진입하자, 우리 부녀회원들은 분 주하게 고기 안주에 진로 소주를 돌린다.

  이제는 일손을 놓고 무료한 시간을 달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인  데도, 관광 나들이를 한다니까 모두가 어린 소년. 소녀의 기분으로 돌아간다. 어느 할머니가 은은하게 흐르던 고전 음악을 신나는 현대 음악으로 바꾸라고 성화다.

   
  관광버스가 화성 휴게소로 다가가니 “서해안 시대”라는 간판이 관광버스를 맞는다.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로 갔는데, 줄서있는 사람이 100명도 넘는 데, 모두가 노인들이라 고령화시대라는 것을 실감한다.  

  용변을 보는 짧은 시간인데도 상인들은 재치 있게 차 속으로 들어 와서 물건을 판다. 노인들에게 인삼향기 뿜는 “파스”를 한 장씩 돌리는 데, “파스”의 필요성을 절감한 노인들이 가족을 위해서 한 갑씩 주문하니 상인은 돈 받기가 바쁘다.  

  10시에 휴게소를  떠나 서산을 향해 달리는 데, 세계에서 9번째 로 길다는 서해대교를 지난다. 길이가 7,3Km에 수상 380m, 지상 503m의 철탑은 45개의 난간을 가교(架橋) 없이 쇠줄을 공중에 있는 철탑에 결착(結着)시켜 다리의 중심을 유지한다고 한다. 

  평택항에는 동남아 선적의 배가 드나든다고 하는 데, 아파트 11층 높이에 3개동을 합친 넓이의 배도 드나든다고 한다. 평택은 육지로 만 알고 있던 나는 항구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중산마을을 떠난 지 2시간 만에 충남 아산 으로 들어선다. 바다를 가로 질은 서해대교의 공사 현장은 못 봤지 만 거대한 철교를 가설한 신공법에서 국력을 실감한다.

  공업단지를 조성하기 위해서 섬을 3억원에 사서 그곳에서 거주하 는 사람을 딴 곳으로 이주 시키고 공업단지를 조성했다니, 역사 는 그렇게 이루어지나보다.
 
  달리는 차창 밖의 풍경은 푸른 데, 아직 농사일은 시작되지 않았 다. 금년은 비가 자주 와서 농사는 풍년이 들 것 같다고 한다.

  윤봉길 의사를 배출한 예산과 더불어 김좌진 장군을 배출한 충절 의 도시 홍성을 지나 고 정주영 씨가 폐유조선으로 물마기를 하였 다는 간척지에 도착하니 11시 10분전이다. 

  제방을 거닐며 간판에 그려진 물마기 현장을 상상하고, 11시 30분 에 안면도를 향해서 관광버스는 출발한다. 도로 변은 꽃으로 곱게 단장 되어 있는데, 2002년 꽃박람회를 계기로 서산지역엔 꽃이 많아 졌다고 한다.

  서산은 산천이 아름다워 송림공원이 유명하지만, 송림공원 뿐 아 니라 멀고 가까운 산들이 모두 아름다운 녹색 공원이다. 안면도 관 광을 마치고 귀로엔 갈월도를 빠져나와 다시 안면대교를 지난다. 창가를 스쳐지나가는 밭엔 마늘과 담배, 생강이 자라고 있으며, 현  대 건설이란 간판이 뒤로 흘러간다.

  수덕사를 지나 한국고건축(古建築)박물관(충남 예산군 덕산면 대 동리)에 도착한 시간은 16시 30분이다. “전흥수”라는 사람이 평생을 목수로 살며 전국의 크고 작은 사찰을 보수해 왔는데, 노년에는 무형문화재 “대목장”이 되어, 사재를 털어서 고건축박물관을 세웠다고 한다.

  제1전시관과 제2전시관이 있는데, 전국의 180개 사찰을 축소 (縮 小) 전시해 놓았다. 제1전시관이 200평, 제2전시관이 100평인데, 목 재로 된 옛날의 목조 건축물과, 철과 세멘트로 된 회색의 근대 건축 물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

  고건축박물관의 관람을 마치고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도착한 시 간은 19시다. 꼬박 12시간을 관광에 소비했지만 모두의 표정은 희열(喜悅)과 만족으로 가득하다.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Mon, 12 Jul 2004 00:08:55 +0900</dc:date>
	</item>
	<item>
	<title>기다리는 마음</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10</link>
	<description><![CDATA[  아침 tv뉴스를 시청하니 우리나라가 고령화 사회로 빠르게 진입 하며, 고령화 인구는 전체 인구의 3%이나, 노인이 지출하는 의료비는 전체 의료비의 10%를 점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고령화 인구에 포함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 하다가 내 나이를 따져보니, 1930년생이라 만으로 쳐서 74세이니 늙었어도 한참이나 늙었다.

  귓가에선 6.25사변 전에 서울 후암동 삼광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대한청년단원’이 목총을 메고 손을 앞뒤로 흔들며 부르는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하는 군가 소리가 쟁쟁하고, 6.25 사변이 발발하자 12월 18일 제2국민병으로 소집되어 남하하는 과정에서 신작로를 걷지 못하고 어렵게 산길을 넘어 날이 저물자 문경 새재(鳥嶺) 밑 초가집 추녀 밑에서 밤을 밝히고, 날이 밝자마자 걷는 것이 추위를 이기는 길이라고 옆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졸고 있는 길동무를 일으키는  순간, 옆으로 눕던 장면이 생생한데 벌써 54년의 세월이 흘렀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가면 1평 땅 밑에 누워있는 젊은이가 수 없이 많으며, 문패 달린 비석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초등학교를 나오고 한 자(一尺) 두 자(二尺) 무명(木綿)을 팔면서 Gate란 영어 단어도 못 배우고, 6.25사변을 겪고 월남전에 참가했어도 국립묘지에 편안이 눕지도 못하고 오늘까지 어렵게 살고 있다.

 1평 땅 밑에 누워있는 사람에 비하면 꽤나 목숨이 길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Gate란 영어 단어를 몰라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모두를 놓치고, 노후대책도 없이 쓸쓸이 지나는 데, 그나마 국가에서 먹여주고 병을 치료해주며 차를 태워주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옛날에는 평생을 나라 발전에 기여했다고 국가유공자로 대우 하더니, 지금은 통일 방해꾼이라고 괄시를 하니 기가 막히다. 공산주의 국가인 이북에서도 6.25전쟁에 참전한 사람은 영웅시 하고, 무슨 행사  때는 훈장을 가슴에 주렁주렁 달고 뽐내는 데, 정작 영웅시해야 할 대한민국에선 통일 방해꾼으로 괄시한다. 

  공산주의 국가나 자본주의 국가나 자기 나라에 대한 충성에는 국경이나 주의주장이 필요 없는데, 대한민국에서는 무엇이 나라를 사랑하는 것인지 헛갈린다. 체제를 전복하려고 북쪽에서 내려온 간첩이 민주화 유공자가 되고, 공산주의 사상을 굽히지 않고 장기 복무하는 죄수를 북쪽으로 보내자는 세상이니, 오래 살고 있는 것 이 한스럽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뇌물(賂物)이라는 단어도 없었고, 노후대책(老後對策)이라는 단어가 없어서 배우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배우지 못한 단어를 후회해본들 소용이 없으며, 얼마 남지 않은 세상을 기대하지 말고 그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2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Tue, 06 Jul 2004 07:23:04 +0900</dc:date>
	</item>
	<item>
	<title>영원한 군인가족-제2땅굴 견학(문정은) * 2004년도 국가보훈처 현상공모 보훈문예물 수필부문 당선작</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09</link>
	<description><![CDATA[ 오늘(2003. 6. 25)은 남편의 군대 동기생(갑종간부 제57기)들이 부부 동반으로 제2땅굴 견학을 하는 “안보 관광의 날”이다. 행사에 참가하려고 광주와 전주,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와 아침 일찍 지하철 제1호선 창동역 앞 광장에 모인다.
  서로가 만나면 반가운 인사와 함께 군대시절, 힘들고 고생하던 이야기가 오간다.
  나이가 70 고개를 넘어 80 고지를 향해서 달리는 고령인데도, 만나면 옛날 군대 시절로 돌아간다.
  일행 45명이 탄 버스가 ‘아스팔트’ 포장도로 위를 제2땅굴 견학을 위해서 달린다. 북한강을 꾸불꾸불 돌아가니 왼쪽 산비탈엔 하얀 아카시아 꽃이 주렁주렁 늘어고, 산 밑 감자밭엔 하얀 감자 꽃이 흐느적거린다. 
  길가 오른쪽에 세워진 38선이란 푯말을 지나니, 도로 양쪽엔 야산이 이어지며, 산에는 잔솔밭에 새 순이 길게 하늘로 향하고, 어린 소나무가 총총히 들어선 모습은 어머니의 젖가슴 같이 포근해 보인다.

   남자들은 차창(車窓) 밖에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옛날을 회상한다. 민통선(민간인 출입 통제선) 안으로 들어서니, 심영수 대령(예비역)이 창밖을 바라보며, “지금 달리고 있는 이 길이 ‘캬라멜’ 도로야, 저기 보이는 저 산은 ‘크리스마스’ 고지이고, 저 산속에 하얗게 솟아있는 동상은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노도같이 밀려오는 인민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김풍익 중령의 동상이지” 하고 신나게 설명한다. 

  국망봉 봉우리는 허리에 병풍을 두른 듯, 푸른 소나무로 가지런히 둘러싸여 보기가 좋으며, 꾸불꾸불 산길을 달리던 버스는 수풀이 우거진 계곡에서 차를 세운다. 
  “이곳이 6.25사변 당시 최초로 인민군과 싸웠던 ‘각흘계곡’이 오, 이 길은 고랑포에서 법원리와 송추 계곡을 거쳐 서울로 들어가는 탱크의 접근로이다”라고 심 대령(예비역)은 설명한다. 
  “여기가 우리 중대의 60mm 박격포 진지였고, 저 능선에서 인 민군과 싸우다가, 집채 같은 적의 탱크가 “꾸룽...,꾸룽” 하고 지 축을 흔들며 저 언덕을 넘어와서 우리는 진지를 옮기고. 대대장 이던 김풍익 소령은 적 전차에 올라가 탱크의 뚜껑을 열고 수류 탄을 넣으며 장렬한 전사를 했지” 하고 심 대령(혜비역)의 설명은 계속된다.
  
  “다부동”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심 대령(예비역)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인민군의 기습으로 38선 바로 밑에 있던 경기도 웅담읍 감악산 진지에서 적과 만나 싸운 것을 시작으로, 여러 전선에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경북 대구까지 밀리고, 낙동강변인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인민군의 남침을 저지하다가, “맥아더” 원수의 인천 상륙으로 길게 뻗은 인민군의 병참선이 중간에서 잘리자 아군은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고, 심 대령(예비역)의 소속부대도 낙동강을 건너 북진 대열에 참가할 수 있었다고 해서, 그에게 붙여진 별명인 데, 흰머리와 주름진 얼굴의 현재를 잊고, 젊은 시절 인민군과 싸우던 옛날로 돌아간다.  
  흐르는 골짜기의 물이 맑아서 손도 담가보고, 눈을 돌려 주변을 살펴보니, 산천의 아름다움은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가 떠오르며, 노루와 사슴이 물 마시러 내려올 것만 같다.

  문득 6.25사변 때, 화천 ‘구만리’ 전투에서 왼쪽 다리를 잃은 4촌 오빠가 하던 말이 생각난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화천 발전소를 확보하려고 ‘구만리’고개에서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는데, 지게부대(노무자)가 고지(高地)까지 운반한 주먹밥을 먹어야 하는 데 중공군과 싸우느라 먹을 시간이 없어서, 작업복 아래 주머니에 넣었다가 전투가 끝나서 먹으려고 꺼내니, 화랑담배 가루와 섞여 뒤범벅이 된 채 꽁꽁 얼었지만, 그것마저 양이 모자라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했다고 한다.
  갈증이 심할 때는 산에서 녹지 않은 눈을 긁어서 물 대신 먹기도 하고, 눈마저 없을 때는 쓰고 있던 철모를 벗어 오줌을 받아 마신 적도 있었다고 한다.

  중공군과 접촉하여 전투를 하는데, ‘구만리’고개 아래 화천강에서 떠내려오는 피아의 군인 시체들이, 뗏목에서 풀려난 통나무 같이, 벌겋게 변한 강물을 빽빽이 메우며 떠내려오더라고 한다.
  옆에서 전우가 쓰러지면 이성을 잃고 적개심만 남아 “돌격 앞으로” 하고 적진을 향해서 돌진하는 데, 앞에 있는 수풀만 의식할 뿐 적의 총알이나 포탄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
  고 “이승만” 대통령은 열세한 우리 국군이 중공군 1개 군단을 섬멸하고 화천 발전소를 확보했다고 해서, 이 댐이 있는 호수 이름을 파로호(破虜湖)라고 명명(命名)했다고 한다.
  산새(山鳥)의 지저귐과 산천의 아름다움, 맑은 공기는 우리 삶 의 활력소를 다시 충전해준다.

  제2땅굴로 가는 길목에 고석정이 있다. 흐르는 계곡 시냇가 암 석 위에 세워진 정자는 신라 진평왕과 충숙왕이 놀던 정자라고 하며 한탄강 중류에 있다.
  조선조 명종 때 문무를 겸비한 ‘임꺽정’이 천민 출신이라고 등 과(登科)의 길이 막히자, 석성(石城)을 쌓고 함경도에서 상납하는 진상품(進上品)을 탈취해서 가난한 백성과 농민에게 나눠주던 활 동의 근거지라고 한다.

  한탄강을 지난 버스가 민통선 안을 계속 달리니, 광활한 벌판에초병(哨兵)이 서 있는 제2땅굴 입구가 나온다. 제2땅굴로부터 휴전선까지는 4Km라고 하며, 휴전선 남쪽 2Km 지점에 남방 한계선이 있으니, 적은 땅 속으로 남방 한계선을 지나, 민통선을 2Km나 침범한 지점까지, 사람이 다닐 수 있는 땅굴을 파내려왔다.

  저녁에 보초 서던 경계병이 발밑에서 느껴지는 땅울림과 희미 한 폭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던 중, 197 5년 가을 아침, 안개 같은 김이 솟아올라 시추를 한 것이 땅굴을 발견한 실마리라고 한다.

  우리 일행 외에도 서울에서 온 듯 한 남자 고등학생들이 안보 교육을 겸해서 제2땅굴 견학을 왔는데, 땅굴은 왕복 길이가 1,2 Km에 달하는 “지하 터널”이라고 한다.

 입구에서 ‘화이바’ 모자를 지급받고 안으로 들어가니, 터널은 천정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며, 바닥엔 고무판을 깔아 미끄럼을 방지하고, 통로를 따라 은박지에 감긴 직경 20cm 정도의 ‘플라 
스틱산소파이프’가 길게 이어지고 있으며, 1950년대를 연상 시 키는 전구가 희미하게 깜박인다. 

  땅굴은 바위를 뚫어 사람이 다닐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으며, 천정이 얕아 땅굴 관람자의 머리가 바윗돌에 부딪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땅굴 입구에서 나눠준 ‘화이바’ 모자를 썼는데도, 남편은 천정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고 주저앉아 옷을 버렸다.

 북한에서 땅굴 작업을 했다는 귀순자는 땅굴 11개를 팠다는데, 오늘까지 4개만 발견됐다. 땅굴 입구에서 화이바 모자를 반납 하 고 돌아오는 길은 철원읍을 경유하게 된다.
  철원읍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잡초만 무성하고, 무성한 잡초 속에 묻혀있는 노동당 건물은 잔해만 남아있다. 옛날에 그 안에서 공산당이 자행한 만행을 생각하니 지옥의 형장(刑場)을 보는 느낌 이다.
   버스로 신작로를 달리는 데, 민통선 안쪽이라 길 오른쪽은 지 뢰 지대이고, 군데군데 붉은 색으로 된 길이 15cm 정도의 세모 꼴 지뢰지대 표시판이 철조망에 달려있고, 인가가 없어서 그런지 살벌한 전쟁 분위기가 감돌고 있으며, 개발이 금지되어 넓은 땅이 경작지로 남아 있다.

  비무장지대로 들어가는 검문소를 지나 전망대로 올라가서 비 치된 망원경으로 북쪽을 바라보니, 인민군 초소와 총구멍, 산허리  에 보이는 대남 선전구호만 없으면, 낮게 깔린 실구름과 함께 파 도처럼 이어지는 낮은 산봉우리가 한 폭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잔파도처럼 면면히 이어지는 산봉우리 속에 철의 3각지가 있 으며, 철원과 김화, 평강이라고 한다.
  이들 산봉우리는 전략상 중요한 고지라 6.25 전쟁 때는 서로 가 뺏고 뺏기는 전를 되풀이 하였으며, 아군 측엔 산세가 험하 고 노출이 심해서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고 한다. 

  호국 영령이 흘린 피의 대가를,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열매를 따 먹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한 삶 뒤에 는 국토 수호를 위해서 목숨 바친 영령들과 전상(戰傷)의 고통 속 에 삶을 이어가는 국가유공상이자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 

  귀로에 남자들은 먼저 간 전우와 인민군과 싸우던 당시를 생각 하는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데, 여자들 도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무거운 상념(想念)에 빠져 있다.
 
  조치헌 중령(예비역) 부인이 “여러분 옛날만 생각지 말고, 현 실로 돌아와 분위기를 바꿔서 기분을 전환 합시다” 하고 차내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며 노래자랑이 시작된다.
  이근유 회장이 “박달재”를 부르고, 문화방송 전주 사장을 지낸 김순환 씨가 현인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신라의 달밤”을 구성지 게 부른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논에는 푸른 벼가 자라고, 네모진 논은 커다란 바둑판을 연상케 한다.
  ‘운악산’ 휴게소에서 시원한 바람을 마시고, 광릉 숲을 지날 때 는 “멍석카페”라는 술집 간판이 스쳐지나간다. 
  멀리 보이는 산허리엔 저녁연기가 자욱하게 띠를 두르고, 구름 과 산 사이엔 석양 노을이 곱다. 초가집에서 가늘게 피어오르는 저녁연기를 보며, 다시는 동족끼리 싸우는 전쟁은 일어나지 않기  를 바란다.

                                               (2003. 7. 1. 고양시 일산에서)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Sun, 23 May 2004 08:19:19 +0900</dc:date>
	</item>
	<item>
	<title>영원한 군인가족- 이웃4촌(문정은)</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08</link>
	<description><![CDATA[  이사를 여러 번 했으나 아파트는 두 번째다. 이사한 지 한 달 만에 앞 집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밤 11시에 손님 배웅 차 현관문을 열었는데, 교회에 다녀오는 길이라며 앞 집 아주머니가 엘리베이터에서 나오기에, 우리집 거 실로 안내하여 인사를 나눈다. 대화가 오가는 사이에 우리는 동갑이고, 남편도 동갑이라는 사실을 안다.

  첫 인상이 편안하다. 그녀는 우리가 이사를 온 것을 알고 있는 데, 사람 사는 집이 조용해서 궁금했다고 한다.
  밤 12시까지 있다가 돌아가고, 그동안 거처가고 신세진 이웃들 을 더듬어본다. 어릴 때는 학교 친구들과 공부를 함께 하고 같이 뛰놀면서 즐거워했고, 상급 학교에 진학하니 새로운 친구가 생겨 경쟁 속에 정이 든다.

  세월이 흐르니 형제 같은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어 아름다운 추 억으로 남는다.
  우리 집은 군인가족이라 군인가족하고만 가깝게 지냈고, 기타 가족들은 멀리 했다. 나이가 들면서 다양한 생활에 호기심을 가 지고 이웃을 대하게 된다.
  다양한 직업과 생활 모습이 나를 즐겁게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일이 즐겁게만 비친다.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도 배워가며 남을 위해서 봉사한다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
  군인가족이란 특수 사회에서 남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갈 때, 이웃들이 나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고, 잔정도 많이 베풀어주었다. 
  
  군인가족이란 특수한 집단에서 아들 둘을 키우며 조심스럽게 살아갈 때, 마음에 거슬리는 일도 참고 견뎌야 했다. 남편이 군 인이란 이유로 일반 가정을 피하고 군인가족이 사는 집을 골라 전전할 때, 훈련소 면회장 뒤에서 살 때, ‘창석’이네는 남편의 유격훈련소 동기요, ‘호원’네는 남편 교장의 교관 가족이다.
  
  우리는 형제 같이 친하고, 어려운 살림도 같이 걱정을 했다.
경북 영천에서 살 때는 ‘송식’이네 가족이 우리 아이들을 자기네 아이처럼 귀여워하고, 여학교 은사(恩師) 내외분은 우리를 친 자 식 같이 귀여워해주셔서 타향에서 외롭지 않게 지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이웃들이 안부도 전하고, 왕래도 하 며 정의 빚을 지고 산다. 남은 세월은 내가 이웃으로부터 받은 만 치, 아니 그보다 많은 정을 이웃에 베풀며 살아가야 하겠다.     


                                                        (1999. 4. 2. 고양시 일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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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Thu, 20 May 2004 03:17:35 +0900</dc:date>
	</item>
	<item>
	<title>우리집 한가윗날(문정은)</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07</link>
	<description><![CDATA[큰아들 작은아들 며느리와 손자 손녀 
우리 집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네 
차례상 차려놓고 절을 할 때는 
식구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네 

네 살 난 원재는 함께 절하고
세 살 난 수진이는 제사상 훔쳐보네
큰아들 술 따르고 작은아들 잔 들고 
조상님 잡수라고 수저 꽂고 잔 올리네

아버지는 옆에 서서 제사법 가르치고
며느리에 전하고자 진설법 설명 하네
조상님께 우리 식구 보살펴 달라고
축원하며 빌고 또 비네

창공에 뜨는 달은 바위덩이인 줄 알면서 
우리에게 행운을 달라고 빌고 또 비네 
우리 집 식구들 한 자리에 모였으니 
내 마음은 흡족하고 행복하네

(1999. 11. 1. 서울 논현동에서)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Sun, 16 May 2004 03:04:27 +0900</dc:date>
	</item>
	<item>
	<title>하얀 눈(문정은)</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06</link>
	<description><![CDATA[  저녁 TV 뉴스에서 대학생 8명이 눈 속에 파묻히고, 3명의 시체가 발견되어 2명은 병원으로 후송되고, 1명은 내일 아침 시신을 수습하고, 남은 사람을 찾기 위해 수색작업을 계속하다고 한다.
눈보라치는 대관령의 고갯길은 1m이상 눈이 쌓이고, 고속도로가 막혀서 언덕을 넘어 서울이나 강릉으로 가던 자동차는 눈 속에 파묻혀 하룻밤을 고생했다고 한다.
  TV 뉴스를 보니 어린 시절에 겪었던 겨울 풍경이 떠오른다. 높은 집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면, 밤새 내린 눈은 발자국 하나 없이 하얗게 싸여있어, 대나무로 만든 마당비로 눈을 쓸어 동네 큰 길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오솔길을 터놓던 생각이 난다.

  40년 전 어린 나이로 시집가던 겨울은 유난히도 눈이 많이 왔 다. 사람 키만큼이나 쌓인 눈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우물에도 못가고, 식수가 없어 눈을 녹여 마셔야 했다.
  남편이 전방에서 직업군인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다. 강원도 지역에서 야간 근무를 하던 군인 30여 명이 눈사태를 만나 눈 속에 파묻혀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남편이 전방에서 고생하고 있으니 고생을 나눈다는 뜻에서, 버선과 양말도 신지 않고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추운 눈길을 걸으며 고생을 사서 했다.

  정초에 휴가를 얻어 고향을 다녀간 친척집 ‘성목’이 조카가, 전방에서 남편을 만나 집소식을 전했으니 안심하라고 한다. 
  남편은 휴가를 얻어 집으로 와선 2대 독자의 외로운 신세를 한탄하며 많이도 울었다.

  1년에 한번씩 있는 장교 정예신체검사에서, 남편은 폐가 나쁘다는 판정이 나와, 기록카드를 쫓아 원주 야전병원에 강제로 입원 하더니, 부산 3.1.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X-ray를 재판독한 결과 오진으로 판단되어 원대복귀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식구를 전방으로 데려갈 엄두도 못 내고, 본인은 원대로 복귀도 못하고, 서울에서 우왕좌왕하다가 더 이상 현실의 벽을 뚫고 나가지 못하자, 유서를 써서 주머니에 넣고 방황했다고 한다.
  한강을 서성이다 물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시내로 들어와서 다방에 앉아 시름에 빠져 있는데, 관상쟁이가 다가와서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라고 하더란다.

  남편은 주머니에 유서를 지니고 다니는 사람을 보고, 가당치도 않은 말을 한다고 한숨지었다고 한다.

  죽기로 작정한 몸이니 염치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자고 결심한 남편은, 육군에서 계급이 제일 높다는 참모총장을 육군본부로 찾아가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보좌관에게, “식구와 같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애원을 해서, 우리는 남편의 바람대로 같이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같이 살 수 있게 도와준 보좌관을 만나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으나 세월이 흐르니 이름도 모르고, 마음으로만 고맙게 생각할 뿐이다.
  강원도 지역에 내린 눈이 1m 30cm가 넘는다고 하니, 40년 전에 내린 눈만치나 많이 내렸다. 
  TV 뉴스 시간에 방영하는 눈보라를 보고 참상을 짐작할 수가 있다. 

  빙벽타기훈련을 하는 대학생들이 빙벽을 타는 데 자신이 있어도, 실수라는 것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다.
  조난 당한 학생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제설작업을 하는 구조대원들의 활동을 보니, 옛날 일이 떠올라 눈물이 앞을 가린다.  

                             창밖엔 오후의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쪼이고 있다.

                                                   
                                           (1998. 1. 18. 서울 논현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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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Wed, 12 May 2004 02:20:22 +0900</dc:date>
	</item>
	<item>
	<title>IMF와 금모으기운동(문정은)</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05</link>
	<description><![CDATA[  어려웠던 일본 식민지 하에서도 나는 어른들 덕으로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는 데,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우리를 살기 어렵게 만든다.
  
  국민을 잘 살게 나라살림을 해야 할 국회의원이 매일 국회에서 싸우고, 부실공사라는 단어가 연일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며 국민의 불만과 불평이 그칠 세 없지만, 우리의 저력은 88올림픽경기를 서울 잠실벌에서 개최하고, 우리 경제도 급속도로 발전하여 국내외에서 모두가 놀라워 할 때, 국가 예산은 낭비되고 부실공사는 우리 살림을 어렵게 만든다.

  외국에선 우리가 샴페인을 일찍 터트렸다고 비아냥거리고, 지각 있는 사람은 나라살림을 근심한다. 금융 실명제는 돈 많은 사람의 과소비를 부추기고, 국민 모두가 절약과 검소라는 단어를 무시하고 잘 먹고 잘 사는 풍요한 삶을 누린다.

  어린이들의 평균 신장이 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질 좋은 삶을 산다고 노래할 때, IMF경제가 우리 몰래 찾아와서 우리를 어렵게 살도록 강요한다.

  환율이 오르고 주가(株價)는 떨어지고, 원유 값은 뛰고 물가는 치솟아 너나 없이 힘들게 살아야 한다. 모두가 분별없이 산 결과로 뜻 하지 않게 IMF를 불러들인 것이다.

  달러를 들여오기 위해서 ‘금모으기운동’을 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금을 모아 외국에 팔아 달러로 바꿔오는 것이다.
  우리는 금이 있을 정도의 살림살이가 못 되지만, 살아오는 동안 기념으로 만든 금반지가 몇 개 있어, 망설이다가 ‘금모으기운동’ 에 동참하기로 한다.

  1969년 5월 남편이 월남전쟁에 참전했다가, 1970년 10월에 살아서 돌아오는 기념으로 월남 현지에서 금으로 반지를 만들어 귀국했고, 1984년 ROTC 임관 기념으로 큰아들이 만들어 준 금반지와 30년 전 친정 동생이 대학 등록금 부족으로 금반지를 준 적이 있는 데, 대학교수가 된 동생이 작년에 내 회갑선물로 만들어 준 금반지가 나에겐 추억이 담긴 소중한 금반지다.

  소중한 기념품이지만, 나라 경제가 어려울 때 금으로 만든 기념반지는 나라 살림에 값진 보탬이 될 것이며, 실물보다는 추억을 가슴에 간직하게 되었다.  

 새마을금고 사무실에서 줄지어 참가신청을 하는 데, TV 촬영기자가 가까이 다가오며 인터뷰를 요청한다. 저녁 뉴스 시간에는 내가 인터뷰 하는 장면이 방영 되겠지.

                                                         (1998. 2. 1. 서울 논현동에서)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Mon, 10 May 2004 03:50:46 +0900</dc:date>
	</item>
	<item>
	<title>영원한 군인가족-평화의 댐(문정은)</title>
	<link>https://www.ymveteran.com/bbs/board.php?bo_table=apark&amp;wr_id=104</link>
	<description><![CDATA[
  새로운 직장에서 발령을 받으려면 시체검사를 해야 한다. 남편은 신체에 이상이 없으니, 자신을 가지고 의사 앞에 섰던 모양인 데, 결과는 당뇨가 비친다는 것이다.
  신체검사를 통과한 남편은 10년간을 아무런 장애 없이 직장에 나가더니, 1987년 5월에 당뇨병 합병증이 와서 뇌출혈로 쓰러진다. 병원에서 4시간의 수술을 하고나니 전신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수술실에서 회복실로, 회복실에서 일반병동으로 옮기는 12일간을 식물인간으로 누워지낸다.

  전신마취에서 깨어나고 2개월의 치료와 투약 끝에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니, 당뇨병과 더불어 뇌를 건드린 부작용으로 오른 쪽을 못 쓰는 반신불수가 찾아온다.
  퇴원과 더불어 기나긴 투병 생활을 시작하며, 집을 사당동에서 논현동으로 옮긴 남편은, 집 앞에 있는 “도산공원”에서 7년의 투 병 끝에 다소나마 건강을 회복한다.

 당뇨병과 반신불수는 완치가 안 된다고 하는 데, 추곡 약수가 당뇨병에 좋다는 말을 들은 남편은 눈이 오는 2월부터 추곡약수를 떠다 마시며 6개월이 지나니 어느 정도 약효를 봤다고 느껴진다.
  
  어느 날 아침(1995. 7. 23. 오전 10시) 전화벨이 따르릉 울리더니, 남편 친구인 김두표 씨가 추곡으로 약수를 뜨러가자고 한 다.

 김두표 씨 부부와 우리 부부는 김씨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강원도 화천을 향해서 승용차로 달린다.
  오전 11시 30분 화천으로 가는 도중 춘천 사창고개 막국수집에서 빈대떡과 동동주를 곁들여 막국수를 들고, 추곡을 향해서 경춘가도를 달린다.
  ‘오봉산’ 고개 넘어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넣고 잠시 쉬는 데, 주유소 여자 주인이 집에서 땄다고 하며 자두 한 사발을 내다 주는데 시골 인심은 후하다.

  강원도를 암하노불(岩下老佛)이라 했는데 말과 같이 첩첩 산중이다. 춘천 시내를 떠난 지 1시간 30분을 달려 추곡(萩谷) 약수 터에 도착한다.
  주차장에서 10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니 약수터가 나오는 데, 절구통 같이 파인 바위틈에서 약수가 계속 솟아오른다.
  약수터로 발달된 조그마한 동네에 여관과 하숙집이 4,5채 있는 데, 전남 광주에서 왔다는 40대의 남자는 온 지가 40여 일이 된 다고 한다. 여관비는 하루에 1만 5천 원, 민박은 잠만 자는 데 7천5백 원이라고 한다. 

  여관과 하숙집에는 약수를 마시며 위장병을 고치려는 환자가 80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약수를 물통에 받아 승용차에 싣고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약수터를 떠난다.
  올 때는 ‘샘밭’에서 ‘오봉산’을 경유해 약수터를 왔지만, 갈 때 는 근처에 ‘평화의 댐’이 있다기에, 댐을 관람하고 ‘파로호’를 거쳐 화천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6.25전쟁 때 열악한 우리 국군이, 중공군 1개 군단을 섬멸하고 화천댐을 확보했다고 해서, 고 이승만 대통령이 “파로호(破虜湖)” 라고 명명(命名)했다고 한다.
  화천 쪽으로 가면서 댐의 수문도 보고 낚시터도 보면서 꼬불꼬불 산길을 돌아, 화천 시내와는 반대 방향인 ‘평화의 댐’이 있다 는 포장도로를 달린다.

  ‘평화의 댐’으로 가는 길에 ‘풍산리’ 군인아파트‘에 살고 있는 큰아들집으로 들리니, 손자와 손녀인 원재와 수진이가 2층에서 제집 식구를 알아보고 “하무니, 하부지”하고 손짓을 하며 반가워 한다.
  오랜만에 보는 며느리, 손자와 손녀는 반가우나 반갑다는 인사도 못하고, 날이 어둡기 시작할 무렵 아들집을 떠나 ‘평화의 댐’ 이 있는 포장도로를 달린다.
  날이 저물어 ‘평화의 댐’을 보려온 사람은 우리 일행밖에 없으며, 출입구 위병소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출입수속을 마친 다음, 포장된 도로를 1시간 가까이 달려 ‘평화의 댐’ 저수지에 도착한다. 
  저수지는 물이 말라 소문보다 빈약했으며, 저수지 둑엔 군인 경비 초소가 있으며, 총을 멘 군인 한 명이 외롭게 둑을 오간다.
  이북의 금강산 저수지가 폭파되면, 서울은 물바다가 된다는 언론보도와 함께, ‘평화의 댐’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할 때, 우리 부부도 참여한 지난날이 회상된다.        
  댐의 존재가 미치는 심리적인 효과를 생각하며, 승용차를 돌려서 서울을 향해 오던 길을 달린다.
                                                            (1995. 7. 30)
]]></description>
	<dc:creator>박경화</dc:creator>
		<dc:date>Sat, 01 May 2004 12:01:2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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