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급자의 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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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화의 노병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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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0,398 2007.11.09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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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 장교가 되면 전선의 지형을 고루 익히라는 취지에서 2년마다 전후방 근무를 번갈아 하는 교류제도가 있어, 가정생활이 안정됐다고 생각하면 보따리를 싸고 새로 발령된 임지로 이사를 가야 하기 때문에, 생활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항상 돈이 없어 경제에 쪼들린다.
내가 결혼한 지 1개월 만에 전후방 교류 계획에 따라 전방으로 가서 오성산 앞에 주둔한 보병 제3사단 제22연데 제1중대 부중대장으로 보직을 받고, 미처 전선의 지형도 파악하기 전에 매년 실시하는 장교정예신체검사에서 결핵환자로 판정되어 사람보다 먼저 기록카드가 원주에 있는 육군야전병원으로 보내지고, 중대 병적부에도 내 이름이 삭제되어, 군대생활을 하는 장교가 아니라 제대를 앞둔 결핵 환자의 신분이 된다.
나는 기록카드를 쫓아 원주에 있는 육군야전병원에 입원하고, 병원열차를 타고 부산 제31육군병원으로 후송된다.
제31육군병원은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장병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못하고 평생을 국가에서 숙식을 책임지고 수용하는 병원이며, 동시에 군대생활이 적절치 못한 장병이 제대를 위해서 기다리는 대기 기능도 한다.
군의관이 내 X-Ray를 다시 판독한 결과, 전방에서 X-Ray를 잘못 판독했으니 군대생활을 계속 하라고 영등포 보충대로 전속명령을 낸다.
제31육군병원이 제대를 앞둔 군인 환자의 대기 병원이라면, 보충대는 신체 건강한 장병이 부대로 복귀하거나 제대를 위한 보충대다.
병원에선 대기 환자를 분류하여 집으로 보내거나 보충대로 보내고, 육군본부에선 보충대에 있는 장병을 분류하여 제대와 전후방으로 명령을 내는데, 나는 병원에서 신체 건강하고, 군대 생활에 지장이 없으니 다시 군대 생활을 하라고 영등포 보충대로 전속명령을 받는다.
경제력 없이 가족을 고향 집에 남겨두고, 전방 부대로 떠난 나는 제대를 위해 제31육군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다시 군대생활을 하라는 명령으로 보충대로 옮기는 짧은 기간에 집에 남겨둔 가족의 안부를 살피니 일상 생활이 말이 아니다.      
어머니는 병석에 누워있고, 신부는 잉태한 태아를 사산한 가운데 식량이 부족하여 나의 귀가에도 환영에 앞서 경제적 부담을 느낀다.
보충대에서 원대복귀 하라는 명령을 받은 나는 원대로 복귀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다가 5일간의 이동기간이 만료되어 탈영 장교의 신세가 된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고 한강 백사장으로 나가 쉴 장소를 물색하노라 강변을 배회하는데, 3월 중순이라 결빙된 얼음이 녹으며 덩어리가 하류로 떠내려 온다.
6.25사변으로 폭파된 철교가 복구되지 않아 나룻배가 한강을 오가고, 백사장 통로에선 헌병과 경찰관이  도강하는 사람을 감시하고 있다.
군데군데 결빙(結氷)된 얼음덩어리가 하류로 떠내려 오는데, 얼음 밑에 사람의 시체가 붙어서 떠내려 온다고 강변에 있던 사람이 빙괴(氷塊)로 모여든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도 현장에 달려가니, 치마저고리를 입은 젊은 여인의 시체인데, 얼굴 모습은 멀쩡하나 겨우내 얼음 밑에 있어서 그런지 손가락이 변형되어 길게 늘어져 있다.
얼음 밑에 붙어서 부유(浮遊)하는 시체를 본 나는 마땅한 휴식 장소를 물색 못하고 시내로 돌아온다.
종로 2가 “황금” 다방에 앉아 멍청하게 시간을 보내는데 밤은 깊어가고, 넓은 홀 안에는 나 혼자 남아서 깊은 사색에 빠졌는데, 40대 후반의 남자가 다방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내 가까이 다가와서 하는 말이, 사회가 불안한 세상이니 관상을 보라고 한다.
나는 돈이 없어 관상을 못 본다고 거절하니 관상쟁이는, “당신은 훌륭한 사람이 될 상이니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가시오”라고 용기를 주며 다방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나는 “쉴 장소를 물색하러 백사장을 배회한 사람에게 허튼 소리를 한다”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비어있는 커피 잔을 앞에 놓고 깊은 사색에 빠졌는데, “수양산 그늘이 안동 80리를 가린다”라는 속담이 떠오르자, 나는 인생의 종착역에 내린 내가 가야 할 목적지도 없고, 장래를 설계할 용기도 없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도 없이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현실을, 높은 사람에게 하소연 하면 헤쳐 나갈 길이 열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다음날 오전에 용산에 있는 육군본부를 찾아가서 참모총장실로 들어가려니까 문 앞에서 집무하던 대령 계급장을 단 보좌관이 방문 목적을 묻는다.
내가 대답하기를, “부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은 장교인데, 가정이 복잡하여 부대로 복귀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방황하다 탈영 장교의 신세가 됐습니다”라고 하자 보좌관 하는 말이, “장교가 그와 같은 약한 마음으로 어떻게 군대생활을 하느냐” 라고 힐책한다.    
  나는, “부대 근무도 가정이 안정돼야 성실한 근무를 기대하는데, 가정이 복잡하니 성실한 근무가 안 됩니다”라고 대답한다.  
 보좌관은 “장교 희망대로 조치하겠으니 부대로 돌아가 열심히 근무 하시요”라고 한다.
나는 탈영 장교이니 부대로 복귀하면 성실한 부대근무 이전에 육군형무소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서울 거리를 또 방황한다.
참모총장 보좌관에게 살려달라고 호소한 지 1주일 만에 원대복귀 명령이 취소되고, 영등포 보충대로 전속한 지 2주일(1957.4.18) 만에, 경북 대구에 있는 육군정보학교(校長 金判植 大領)로 전속 명령이 나서, 나는 보좌관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고향으로 내려가 가족을 대동하고 임지로 향한다.
50년이 흐른 지금 보좌관의 이름은 잊었으나 행복한 노후를 즐기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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